a man eating bread in a field surrounded by palm trees: André Chung, Cane Cutter, Havana, Cuba

이것은 나의 몸이라

음식과 자유에 관하여

저자 에드위지 당티카

다른 언어들: Deutsch,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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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너는 이빨로 네 무덤을 천천히 파는구나!” 내 친구의 아버지는 먹는 걸 좋아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셨다. 사실 그녀의 아버지가 이런 말을 처음한 사람은 아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말들을 스스럼없이 했고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그 친구와 나는 그 아버지처럼 말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답하곤 했다. “저희도 알아요!”

음식을 구하기 힘든 사람들, 음식이 충분하지 않은 사람들, 위험해 보이는 음식을 먹어야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면 친구의 아버지가 했던 말이 종종 생각이 났다. 일례로 내가 이민자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음식에 관한 문제가 자주 일어남을 볼 수 있었다. 수용소의 많은 사람들은 형편없는 음식을 제공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장 불편한 시간인 새벽 4시에 아침식사를, 오후 4시에는 저녁식사를 제공받았다.

심지어 몇몇은 차가운 바닥에서 자야 했다. 하지만 가장 굴욕적인 고통은 다름 아닌 그곳에서 제공되는 음식이었다.

14년 전, 아이티에서 보트를 타고 마이애미로 건너온 여성들과 아이들을 수용하기 위해 마련된 플로리다 남부의 어느 호텔에서 한 여성을 만났다. 그 여성은 항상 체한 상태라고 말했다. 대부분의 여성들은 먹었던 음식을 토하거나 설사병에 걸리기 일쑤였다. 호텔방 하나에서 여섯 명이 살았고 심지어 몇몇은 차가운 바닥에서 자야 했다. 하지만 가장 굴욕적인 고통은 다름 아닌 그곳에서 제공되는 음식이었다. 자신들의 몸 속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조차 그들이 선택할 수 없었고, 그로 인해 병에 걸리고 비참한 상황으로 내몰렸다.

1980년대 초반 내가 십대였을 때 부모님은 나를 데리고 교회 집사님들과 함께 브룩클린 해군 주둔지역 근처 수용소에 있는 아이티 난민들과 망명 신청자들을 방문하러 가곤 했다. 그곳에서도 음식에 대한 문제가 대두되었다. 그 당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던 남자들은 자신들이 먹는 음식 속에 여성형유방증, 즉 여성처럼 가슴이 나오게 하는 호르몬이 들어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 수용소에 있었던 한 남자는 나의 아버지에게 다가와 “그들이 우리를 온순한 여자로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라고 말했다.

1987년 10월, 마이애미 크롬 수용소에 수감 중이던 30명의 아이티 남자들은 수용소 안에서 여성형유방증에 걸렸다고 연방정부를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했다. 마이애미 수용소와 브룩클린 수용소에 있던 남자들이 모두 아이티인들이며 수감 중이었다는 사실을 제외하면 유일한 공통분모는 그들이 제공받은 음식이었다.

소송을 통해 수용소에서 사용했던 동물용 살충제와, 이와 옴을 방지하기 위해 제공되던 독한 크웰 바디로션이 여성형유방증을 유발했을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를 통해서는 여성형유방증이 식단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을 밝혔고, 그로 인해 수감자들은 그들이 제공받은 음식을 통해 병을 얻었음을 확신했다. 하지만 이런 조사에도 불구하고 배심원단은 이 문제에 대해 정부의 책임은 없다고 판단했다.

a man eating bread in a field surrounded by palm trees: André Chung, Cane Cutter, Havana, Cuba

안드레 청, 사탕수수 수확, 쿠바 하바나 작가의 허락을 받고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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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심한 절망이나 괴로움 속에서 먹은 식사는 항상 기억에 남는다. 사형선고를 받은 죄수가 사형집행을 받기 직전에 선택한 마지막 식사는 항상 많은 관심을 불러 일으키기에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말과 함께 사형집행 후에 열리는 기자회견에서 자주 언급된다. 가장 유명한 마지막 식사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이라고 할 수 있다. 최후의 만찬은 모든 마지막 식사의 원조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받아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마시라, 이것은 내 피니라”고 말씀하시며 자신을 비난하고 배반할 자들을 포함한 그의 제자들과 함께 누룩 없는 빵과 포도주를 드셨다.

수년 전, 아버지와 교회 형제들과 함께 브룩클린 수용소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 있는 많은 남자들은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그 이후로 방문한 여러 수용소에 만난 여성들 중 일부도 신앙심을 갖고 있었다. 보호자 없이 수감되어 있던 많은 아이들은 십자가 혹은 성 크리스토포루스 메달(어린 예수를 어깨에 메고 급류의 길을 건너는 성인이 새겨져 있는 메달)을 다른 성패들과 함께 지니고 다니며 고된 여정 속에 있는 자신들을 지켜줄 것이라 믿었다. 성 크리스토포루스는 작고 여린 아이를 데리고 요동치는 강을 건넜다고 알려져 있다. 그 아이는 도움이 필요한 어떤 아이를 상징하기도 하고 어린 예수로 생각되기도 한다. 성 크리스토포루스 역시 수용소에 투옥되어 사형으로 삶을 마감한 이민자였다.

사막을 건너고 요동치는 강을 건넌 많은 아이들은 며칠이라도 견딜 수 있는 음식을 세밀하게 준비해서 길을 떠난다. 부모들과 아이들은 그 이후에 음식이 떨어지면 음식과 물을 돈을 주고 사거나 누군가로부터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굳게 믿는 수 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다. 이것은 마치 자유를 갈망하며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람들을 인도할 램프가 밝게 빛나며 황금 문이 아직도 열려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과 같았다.

a boy in an open-back bus surrounded by many people: Carl Juste, Crushed, Port-au-Prince, Haiti

칼 저스트, 짓밟힌,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작가의 허락을 받고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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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티에서 온 이민자이셨던 부모님은 나와 내 남동생들이 미국 문화에 익숙해 질 수 있도록 이틀에 한번 꼴로 먹는 밥이나 콩 그리고 플랜테인 바나나(다른 바나나에 비해 단맛이 덜하고 크기가 커 요리에 자주 활용되는 바나나)와 같은 아이티 음식 대신에 매주 금요일마다 미국 음식인 피자나 후라이드 치킨 아니면 핫도그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먹을 수 있도록 하셨다. 나는 매일 학교 점심으로 이런 미국식 음식을 이미 먹고 있다고 차마 부모님께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부모님까지 내 이빨로 내 무덤을 파고 있다고 생각하실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너무 배고픈 채로 돌아다니지 말라

어머니는 나와 내 남동생들에게 “빈 자루는 설 수 없단다(sak vid pa kanpe)”와 “오직 네 배속에 든 것만이 네 것이다(se sa k nan vant ou ki pa w)”를 자주 말씀하셨다. 우리들은 항상 어머니께 “네”라고 대답했다. 어머니는 특별히 이러한 말들을 우리가 다른 사람의 집에 초대되어 식사를 하러 가기 전에 꼭 말씀해주셨다. 우리 집의 가훈이자 어머니가 자주하셨던 말 속에는 너무 배고픈 채로 돌아다니지 말라는 의미가 있다. 식사 초대를 받은 집에서는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배가 너무 고프더라도 절대 티를 내면 안 될뿐더러 어떤 집을 우연히 식사시간에 방문했을 땐 아무리 배가 고파도 같이 식사하자는 주인의 권유를 거절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식사시간에 맞춰 그 집을 방문한 욕심쟁이로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선택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사람들, 다른 사람이 주는 음식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사람들, 자신이 너무나 싫어하는 음식이지만 어쩔 수 없이 먹어야만 하는 사람들,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음식을 먹어야만 하는 사람들… 이러한 사람들을 만날 때면, 앞서 말한 모든 것들이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 라흐다르 부메디네(Lakhdar Boumediene)는 2002년부터 2009년까지 관타나모에 있는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2017년 그는 뉴 리퍼블릭(The New Republic)잡지에 자신의 단식투쟁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글을 썼다.

“나는 내가 왜 단식 투쟁을 했는지에 대해 가끔씩 질문을 받곤 한다. 죽고 싶었나요? 포기하고 싶었던 건가요? 나의 대답은 ‘아니오’이다. 내가 먹지 않았던 이유는 죽고 싶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받는 부당함에 대해 항변해 보지도 않은 채로 주는 것을 계속 받아먹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런 이유 없이 나를 가두고 결백함을 주장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고문하고, 잠을 못 자게 하고, 독방에 가둠으로 내 삶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했지만 그들의 음식을 삼키게 만큼은 할 수 없었다.”

2013년 7월, 모스 데프(Mos Def)라고도 알려진 랩퍼이자 사회운동가인 야신 베이(Yasiin Bey)는 관타나모 만 수용소에서 단식 투쟁을 했던 수감자들이 당한 강제 급식을 체험하기로 했다. 베이는 전기고문 의자와 같이 생긴 의자에 앉아 손과 발, 머리까지 묶여졌고 영양분이 공급되는 비강 튜브를 코와 식도를 거쳐 위까지 삽입했는데, 이는 미국 군대에서 내장 영양공급이라 불리는 방식이었다. 온 몸을 비틀며 저항했지만 눈물만 흐를 뿐이었다. 베이는 구역질과 함께 기침을 계속 했고 움직이지 못하도록 자신의 가슴과 배를 누르고 있는 간수 역할을 하는 사람들에게 제발 멈춰달라고 사정했다. 1분 정도 지나자 심하게 몸부림을 치는 통에 억지로 끼어져 있었던 튜브가 빠졌다. 간수들이 다시 튜브를 끼기 위해 베이를 붙잡자 “전 야신 베이입니다. 제발 멈춰주세요. 더 이상은 못하겠습니다.” 라고 소리치고 나서야 간수들은 베이를 놓았다. 고문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었다. 묶였던 몸이 풀리자마자 베이는 울면서 쓰러져버렸다.

만약 베이가 실제 죄수였다면, 간수들은 정해진 양을 억지로 먹이기 전까지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관타나모 만 수용소에 수감된 채 단식투쟁을 했던 수감자들은 하루에 두 번씩, 두 시간 동안 이렇게 음식을 강제로 먹어야 했다. 인슈어(Ensure)라는 영양 보충제가 들어간 액체가 몸 속으로 들어가는 동안 입에는 마스크가 씌여졌다. 물이 전혀 제공되지 않는 자신의 ‘건조한’ 감방으로 돌려보내진 이후에는 구토를 하는지 안하는지 철저하게 감시를 당했다. 만약 보충제를 토해냈다면, 다시 온 몸이 묶이는 의자에 앉아야 했다. 많은 이들이 그 의자에 앉은 채 소변과 대변을 봤고, 그럴 수 밖에 도리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보충제를 투입하는 튜브로 인해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이슬람교의 성월인 라마단 기간 동안 금식을 하는 수감자들은 동트기 전과 해가 진 후에 강제급식을 당했다. 이번 년도 초에는 텍사스, 마이애미, 피닉스, 샌디에고, 샌프란시스코 이민자 수용소에서 단식 투쟁에 참가한 수감자들이 연방 판사의 판결에 따라 모두 비강 튜브를 통해 강제로 영양제를 먹어야 했다. 수감자 가족들에 의하면 강제 영양공급은 수감자들을 평생 구토와 코피에 시달리게 한다고 한다.

two people sifting grain in a dark room lit by sun rays: Carl Juste, A Day’s Work, Port-au-Prince, Haiti

칼 저스트, 하루의 노동, 아이티 포르토프랭스 작가의 허락을 받고 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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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안의 어른들은 어떤 사람이 특별한 이유나 질병 없이 죽는다면 그 죽은 사람은 ‘먹혔다’라고 말한다. Yo mange li. ‘그들이 남자를 먹었다’ 혹은 ‘그들이 여자를 먹었다’라고 말하는데 여기서 ‘그들(Yo)’은 한 사람일 수도 여러 사람을 의미할 수도 있다. 나쁜 의도를 가진 이들은 자신들은 멀리 떨어진 채 다른 이들을 죽이기 위해 파괴적인 길로 이끄는 자들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거나 자신을 고귀한 희생물로 바치기를 원하지 않는 한, 이런 식으로 다른 이들에게 먹혀지길 원하는 사람은 우리 중에 아무도 없을 것이다.

이것은 나의 몸이요, 이것은 나의 피요, 이것은 나의 아들이요, 이것은 나의 딸이요, 이것은 나의 희망이요, 그리고 이것은 나의 꿈이다.

1990년대 초반 무렵 쿠바의 관타나모 해군기지는 테러리스트 용의자들을 무기한 수감하기 위한 군 교도소로 사용되기 전까지 3만 7천명의 아이티인 망명 희망자들을 수용하는 창고였다. 민주적인 방법으로 처음 선출된 대통령인 장베르트랑 아리스티드(Jean-Bertrand Aristide)가 군사 쿠데타로 인해 쫓겨난 후, 망명 희망자들은 아이티를 떠나 미국으로 가는 공해상에서 미국 해안경비대에게 붙잡힌 자들이었다. 당시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에 감염된 이민자들은 미국 입국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에 HIV 양성 반응을 보인 망명 희망자들은 관타나모 수용소에 기약 없이 수감되어 있어야 했다. 2백여명이 넘는 HIV에 감염된 아이티인들을 이끈 사람은 두 명의 자녀를 둔 어머니이자 아이티 정치 운동가인 욜란데 진(Yolande Jean)이였다. 그녀는 1993년 1월 23일부터 90일간 단식 투쟁을 진행했다. 그 당시 욜란데 진은 미국인 기자들을 향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몸은 무너지더라도 영혼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단식 투쟁을 시작했습니다. 나의 형제와 자매들이 살 수 있도록 기꺼이 제 목숨을 바칠 것입니다.”

그녀는 1993년 관타나모 만 수용소에서 단식 투쟁을 하고 있을 때 자신의 가족, 특히 자신의 아들인 힐과 제프를 위해 편지를 썼다.

가족들에게

힐과 제프야 더 이상 엄마를 기다리지 말아라.

엄마는 이 힘든 삶 속에서 길을 잃었단다.

이제 너희들은 엄마가 없지만 기억하렴.

엄마는 나쁜 엄마가 아니었단다.

단지 이 삶이 나를 멀리 데리고 가는구나.

잘 있으렴 나의 아이들아.

안녕, 나의 가족들. 다른 세상에서 다시 만나자.

욜란데 진은 극적으로 살아남았지만 HIV 감염자로 단식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은 석방된 후 그중 절반이 사망하였다.

우리들 중 얼마나 많은 사람이 용기 있게 이런 편지를 쓸 수 있는가? 얼마나 많은 어머니들이 이 같은 편지를 써야 할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나의 몸이요, 이것은 나의 피요, 이것은 나의 아들이요, 이것은 나의 딸이요, 이것은 나의 희망이요, 그리고 이것은 나의 꿈이다. 이것은 나의 삶이었고, 이것이 내가 살았어야 할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생각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라고 말해야 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평화로운 교제의 식탁 앞에서 이러한 기원을, 이러한 기도를, 이러한 애도를, 이러한 장송가를 불러야 할까?

지은이

에드위지 당티카(Edwidge Danticat) 는 많은 책을 쓴 저자입니다. 2019년 8월에 여러 이야기들을 모아 저술한 Everything Inside라는 책이 Knopf 출판사를 통해 출간될 예정입니다. 당티카 작가는 2009년 맥아더 펠로(MacArthur Fellow)상과 2018년 노이슈타트 국제문학상(Neustadt International Prize for Literature)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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