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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bstract painting of books on a desk

    선택, 그 크나큰 신비

    마약과 소설 너머, 자유를 갈망하다

    - 조던 카스트로

    2025년 05월 12일 월요일

    다른 언어들: español,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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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몬 드 보부아르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을 자율적 주체로 보이게 할 만큼 설득력 있는 매력을 지닌 것이 소설이라고 했습니다. 독자가 등장인물들의 경로를 예측하기 어렵고, 그들이 어떤 이념이나 성격 유형들의 판박이가 아니라 스스로 결단을 내리는 주체적 인물인 소설이 더 좋은 소설입니다. 물론 소설 속 인물은 실제로 자율적이지 않고 책갈피 양면에 인쇄된 단어에 지나지 않지만, 이런 환상적인 자유야말로 보부아르에게는 소설에 생명을 주는 요소입니다. 《죄와 벌》에 등장하는 라스콜리니코프는 누가 그 책을 읽는지와 상관없이 살인죄를 고백하겠지만, 처음 그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독자는 이 매혹적인 자유의 환상에 참여함으로써 소설에 확 빠져들게 됩니다.

    청년의 때처럼 소설에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설렘이 가득합니다. 불확실한 미래, 무수한 선택의 가능성이 자유를 느끼게 합니다. 미래란 벽이나 길이 아니라 미지의 장소로 들어가는 흩어져있는 수많은 문이며, 원한다면 그 문을 드나들거나 좋아하는 곳에 그냥 머물러있어도 됩니다.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어 흥미진진합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모든 일이 죄다 발생할 수는 없습니다. 소설이 술술 읽히기를 바라거나 순탄한 인생만 원한다면 선택의 폭은 좁아집니다. 우리에겐 어떤 면은 자유롭지만 다른 면에는 고통스러울 정도의 한계가 있습니다. 제가 팔을 펄럭이며 날아다닐 수 없는 것처럼 말입니다. 도덕적, 영적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과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길은 좁습니다. 물론 우리는 인생의 작가가 쓴 위대한 드라마의 등장인물로서 적절히 주어진 개성과 상황, 이야기 흐름에서 자유롭게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론은 일관성을 상실한, 읽을 수 없는 작품이 되고 맙니다. 선택이라는 크나큰 신비는 소설에서는 환상이지만, 삶에서는 현실이며 우리의 자유를 구속합니다.

     
    abstract painting of books on a desk

    〈열린 책〉, 후안 그리스, 유화, 1925. 

    소설은 우리를 의사 결정에서, 혹은 철학자 이핑 옹(Yi-Ping Ong)이 말한  “숙고적 성찰”에서 일시적으로 해방합니다. 삶의 실존적 문제는 선택, 정체성, 생각의 방식에 무의식적으로 영향을 미치며, 이와 무관한 생각이란 거의 없습니다. 인간이 가진 의식은 자기 삶 곧 자기 자신과 결속되어 있어서 의식 자체를 객관적이고 자유롭게 성찰하기는 어려운 일이며, 특히 본인의 의식을 성찰하기는 더더욱 어렵습니다. 자기관찰이 가능하고 스스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은 경우 외부 관찰자의 눈에는 명확한데 정작 자신은 눈먼 사람이 됩니다. 생각이라는 행위에는 수많은 사려 깊은 고민이 동원되지만, 소설을 읽을 때는 이런 것이 거의 무시됩니다. 책을 읽는 동안에는 일시적으로 제 안에 들어온 다른 의식이 제 의식을 대체하는 일종의 림보(limbo) 상태가 됩니다.

    제대로 읽으려면 독자는 죽어야만 하니까요. 이핑 옹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특히 사실주의 소설은 참여자의 관점에서 있음직한 인생 경험 상황을 그려내기 때문에, 이 인식을 받아들인 독자는 등장인물이 짊어질 정상적인 책임에 부담을 갖게 된다.” 독자는 자신의 개인적 이해관계와는 무관한 새로운 의식을 받아들이고, 먼 곳에 있는 작가가 실재라고 느끼게 만든 가상현실 속의 의식을 채택하여 가상의 화자나 주인공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여기서 자유의지는 환상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것에 자기를 굴복시키지만, 이러한 굴복은 무엇을 선택할지 검토하고, 분별하고, 결정해야 하는 책임의 회피일 수도 있고, 강박적 도피나 더 나쁜 것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페르난두 페소아는 “문학은 삶을 무시하는 가장 유쾌한 방법”이라고 썼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 소설에 끌렸던 것 같습니다. 특히, 사춘기의 혼란과 고통에 관해 말하는 책들을 많이 읽었습니다. 동질감을 느낄 수 있는 책들에 끌렸던 것입니다. 즐겨 읽던 소설들은 제가 순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특정한 의식의 질감을 지녔지만, 동시에 생각과 행동 사이에 어정쩡하게 머물며 병적인 성찰에 빠져들게 했습니다. 독서와 사색이 마치 행동처럼 느껴졌습니다. 침대나 방바닥에 앉아서 움직인 것이라곤 책을 읽느라 좌우로 굴린 눈동자뿐이었습니다. 책을 읽으려고 학교에 결석했고, 다른 이들의 작품 해석은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밖으로 나갈 길이나 밖을 내다볼 창문도 없는 컴컴한 방 안에 얼어붙은 얼음덩이처럼, 온기나 생명 없이 오직 책장을 바라보며 행동했습니다.

    게다가 타인에 대한 통찰력을 주는 문학의 독특한 능력에 반해 저 자신에게조차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등장인물들, 여러 상황, 갈등에 나를 투영했습니다. 마이클 W. 클룬은 자신이 가르치는 문학 전공 학생들이 본문에 존재하지 않는 내용에 대해 글을 쓰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합니다. 그들은 지면에 있는 실제 단어를 읽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투영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본문에 끌어들입니다. 한 단어가 자신을 비추는 작은 반사경이 되기도 하고, 한 문단이 거울의 방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독서는 다른 의식으로의 도피와 투영이 뒤섞인 일이었고, 읽은 모든 것은 결국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도피와 자기중심의 혼합은 곧 닥쳐올 일을 예고했습니다. 나는 새로운 종류의 욕망과 계시에 짓눌려 무너졌고, 그것은 곧 내 인생의 또 다른 장을 여는 추락이었습니다.

     
    abstract painting of books on a desk

    〈창가의 정지된 삶〉, 후안 그리스, 유화, 1922.

    문학을 향한 집착은 마약과 술이라는 또 다른 집착과 일치했습니다. 소설은 마약과 마찬가지로 제가 아닌 무언가에 이끌려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의식의 변화를 자아냈는데, 그 의식이란 쉽게 말해 쾌락이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예술의 주된 목표가 본질적으로 마약의 효과와 같은 쾌락이라고 합니다. 과도한 탐닉은 우리를 함정에 빠뜨립니다. 키르케고르가 ‘성찰’이라고 불렀던, 추상적 사고와 끝없는 사색에 빠지는 쾌락은 금세 습관적 우유부단으로 변질됩니다. 환상적이고 미적인 인상은 처음에는 즐거움과 희망을 주지만, 곧 사소한 긴장 상태를 유발하고, 여러 작은 회피와 부정으로 뭉친 고정된 상태를 만듭니다. 아름다움, 고상한 감정, 흥분이 실존적 현실에서 도피하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 고통으로 바뀌고 맙니다.

    분산된 생각은 논리 정연하지 못하고 시큼하게 상한 우유처럼 사람의 몸을 상하게 합니다. 우리를 억압하는 것은 내면에서 비롯됩니다. 소설과 마약에 빠져있던 시절에는 모든 게 모호했습니다. 저에게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무언가를 향해 에너지를 쏟을 수 있는 가치관이나 목표가 없었습니다. 종교나 명확한 도덕적 기틀도 없이 자랐습니다. 나약하고 교만하고 분노가 많았기 때문에 책임이란 건 일찌감치 무한정 포기했고, 고통과 실패의 원인을 세상과 주변 사람들 탓으로 돌렸고, 세상도 그런 식으로 봤습니다. 끝없이 읽고 또 읽었습니다. 상황이 아무리 불리해도 어떻게든 문학이 저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헤로인을 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제 삶은 문학으로 고쳐지지 않는다는 걸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 사회는 어떻게 구성되어야 하고, 사상은 오직 다른 사상과 관계해 존재해야만 한다는 제 생각은 자의적이고 자기모순이었습니다. 이론적인 청교도주의에 불과했던 도덕적 상대주의, 연결성을 지닌 문학과 자신을 표현하는 글쓰기를 중요하게 여긴 제 생각은 본질적인 행동을 변화시키는 힘이 없었습니다. 의지만으로는 제 통제를 벗어난 어렴풋한 무언가를 극복할 수 없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오늘은 약에 취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지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았는데 차를 몰고 마약을 구하러 갔습니다.

    직장을 유지할 수 없었고, 부모님 집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때 부모님이 제 상태를 알게 되셨고, 어머니는 당신의 지갑을 침대 밑에 숨겨 보관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밤 어머니가 주무시는 침실로 가 침대 밑에 있는 지갑을 꺼내 60달러 중 20달러를 훔쳤습니다. 복도로 나왔을 때 울음이 터졌습니다. 나머지까지 집어내면 뻔히 들킬 줄 알면서도, 다시 기어가 남은 돈마저 훔쳐내고 말았습니다. 제가 전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진정으로 원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습관적으로 선택과 책임을 회피하며 오히려 그것이 저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변명했습니다. 해야 할 선택은 켜켜이 쌓여 외압이 되었습니다. 무언가 또는 누군가가 마치 꼭두각시 다루듯 제 팔다리를 조종하는 것 같았고, 탈출하려고 아무리 생각하며 애를 써도 달라진 건 없었습니다.

    제 독단으로 억압적인 세상에 순응하는 것에서 벗어나 자유를 찾아 나섰으나, 그보다 훨씬 폭압적인 것에 저를 던져버린 것입니다. 약물 과다 복용, 감옥, 사람을 가리지 않는 절도, 끝없는 거짓말, 그리고 더욱 심한 것은 저의 통제를 벗어난 무언가에 끌리는 신비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다른 사람이 억압이라고 느끼는 직업, 인간관계, 숱하게 순응해야 하는 압박감 등 많은 것에 자유로웠지만, 그 외에는 노예였습니다. 찌꺼기 같은 느낌, 창백한 일상의 반복. 정작 나 자신이 될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당시에는 이런 문제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탈출구 없이 그저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느낌에 압도됐습니다. 삶을 개선할 방법을 생각해봤지만 제 생각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다르게 행동하려고 노력도 해봤지만 실패했습니다. 이것저것 무수히 읽었건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제시하는 지도는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에겐 그렇게 할 힘이 없었습니다.

    나의 참모습을 찾으려는 시도는 오히려 아예 다른 사람이 되게 만들었습니다. 추상적 의미의 '다른 사람'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다른 사람인데, 어느 한 사람을 만나면서 저는 그를 모방하고 경청했습니다. 그는 예전에 제 친구들과 친하게 지내기도 했고, 제가 글쓰기에 한창 몰두하던 시기에 같은 집에서 잠깐 살기도 했었는데 다시 만났을 때 몰라보게 변해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처럼 살고 싶다면 자기가 한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다르게 생각하거나 지식을 더 발전시키거나 새로운 결심을 할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앞서 해왔던 그것을 따라 하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저는 그 말을 믿어야만 했습니다.

    그때는 절박했습니다. 그가 기도하라 해서 기도했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날 걸 기대하진 않았지만, 진정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광채나 깨우침 같은 것도 없었습니다. 아침에는 도움을 구하고 밤에는 감사하라고도 했는데, 최악의 설정은 그것을 벽에 대고 말하는 일이었습니다. 또 거짓말을 관두라고 했습니다. 당장 거짓말을 끊지 못했지만, 거짓말을 했을 경우 그에게 알리고 바로잡았습니다. 한번은 지인과 대화하는 도중 직업에 대해 거짓말을 했습니다. 나중에 그에게 전화해서 사실은 공사 현장에서 일한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는 뭐라 대꾸해야 좋을지 몰라 했습니다. 통화를 할 땐 몹시 창피하여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습니다. 하지만 전화를 끊었을 땐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기분을 느꼈습니다. 자유였습니다.

    느리고 고된 여정이 계속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잘한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의지와 관점이 변했기에 하고 싶지 않은 일도 수행해야 했습니다. 10리를 걸어 들어왔으니 나가려면 다시 10리를 걸어야 했으니까요. 제 일부는 저항했습니다. 그렇지만 책임은 지고 남 탓은 말아야 했습니다. 아주 조금씩, 정신을 괴롭히는 책임 회피에서 도망가는 대신, 비록 불완전하고 두려움이 가득 차있기는 했지만, 갈팡질팡 맞서 싸웠습니다. 아주 조금씩 길이 보였습니다.

    abstract painting of books on a desk

    〈카라페와 책〉, 후안 그리스, 유채화, 1920.

    이 무렵 제 삶에서 문학의 역할은 모호했습니다. 무작정 읽고, 글은 거의 쓰지 않았습니다.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이고 치료적이던 글쓰기의 이유는 사라졌습니다. 미학에도 집중해봤지만, 한동안은 효과가 있다가 끝내는 공허했습니다. 스스로 쌓아 올렸던 자기 정당화의 껍질을 서서히 벗겨냈습니다. 그러자 말이나 글이 아닌 행동과 진실에 기반한 새로운 종류의 가능성, 새 삶이 드러났습니다. 살아있는 새로운 존재 유형을 찾았습니다.

    그러자면 규율 속의 자유, 겸손 속의 힘, 회개 속의 자존감, 겉보기에 좁은 선택지 속의 확장성 같은 역설에 익숙해져야 했습니다. 또한 선택 역량을 키우기 위해 본받을 만한 본보기가 필요했습니다. 이전까지 저는 근본적으로 혼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즐겼던 문학의 또 다른 측면은 존재의 위협이 없는 의식 세계에서 억압이나 희생 없이 시간을 초월해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책장에 적힌 글에 없는 요구 사항이 있었습니다. 삶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책임 있게 살아야 했고, 대부분은 기대 이하였지만 이 책임에 부딪혀가며 자신에 대해 배우고 성숙해 갔습니다.

    현재의 나와 장차 되고 싶은 내 모습이 불일치한다는 인식은 다른 이들의 선의에 힘입어 저를 돌아보게 했고, 나아갈 길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고칠 수는 없었습니다.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찾아야 했습니다. 언어적인 또는 문학적이거나 철학적인 도움이 아니었습니다. 바라는 행동을 본받아 내면의 삶이 변화될 수 있게 내 몫을 하고 싶었습니다. 마약에 취하거나 남의 것을 훔치는 행동이 내면을 악화시킨 것처럼, 누군가를 돕기, 정직하게 말하기 같은 행동은 내면의 삶을 나아지게 했습니다. 행동을 새롭게 할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지만, 생각을 새롭게 만드는 행동은 할 수 있었습니다. 그저 읽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새로운 삶을 실존하게 할 수 없었습니다. 행동해야 했습니다.

    행동이란 단순히 도덕적 명령과 규율로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폴 틸리히가 쓴 글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해방적 진리를 만날 수 있는 형태는 여러 가지가 있으나, 단 한 가지 형태만은 예외다. 종이에 베껴 집으로 가져가는 방법으로는 어림도 없다.” 사람을 모델로 하는 것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 저를 도와주던 친구가 죽고, 다른 친구들도 이사하거나 길을 잃었습니다. 솔직히 나도 전진하지 못했습니다. 이전의 생각과 행동이 새롭고도 교묘한 형태로 다시 드러났기에 올바른 진로를 잡으려면 겸손과 의지가 더욱 필요해서 저의 행로는 직선보다 상향 나선 모양에 가까웠습니다. 상황은 여전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암담했고, 죄와 죽음은 사라지지도 피할 수도 없는 현실로 삶과 환경에 파고들었습니다. 이 시점에, 저의 삶은 작아졌고 하나님마저도 왜소했습니다. 더 큰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의구심을 품은 채 마지못해 더 큰 하나님께로 끌려갔습니다. 아내 니콜렛은 우리가 사귀기 직전에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자기 어머니와 함께 교회에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일을 경험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임재였습니다. 저는 기독교인을 많이 만나보지 못하고 자란 데다 기독교에 관해 전형적인 편견이 있었습니다. 막연한 신을 믿고는 있었으나 그 이상은 터무니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익숙한 문화에서 믿음의 선언이라는 것은 완전히 해롭지는 않더라도 분명 꺼림칙한 것이 있습니다.

    처음에 기대한 것과는 달리 니콜렛의 회심은 일시적 현상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주 만날 수 없었던 연애 기간 도중에 저의 친구가 죽었고 그 여파로 저는 대수롭지 않게 익숙했던 길로 돌아가려 시도했다가 다시 제정신을 차린 후 호의의 표현으로 그녀의 어머니를 교회에 모셔다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질색하면서도 일요일마다 갔습니다. 그 후 니콜렛의 어머니는 설교에 관한 제 궁금증에 답해주셨는데 모든 대답이 본질적으로 이해 불가였습니다. 이사 후 친하게 지내는 몇몇 기독교인을 만나 우리 집에서 독서 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신학 입문서들을 읽었는데 그들은 저의 질문과 항의에 끈기 있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예수님이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어떤 책 한 권이나 토론보다도, 함께 밥을 먹고 어울리는 행위가 저를 차츰 부드럽게 만들었습니다. 실제로 그리스도인들은 어울릴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전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한번은 인근 수도원의 한 형제가 독서 모임에 와서 함께 복음서를 읽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를 한 번에 한 권씩 소리 내 읽은 후 저녁을 먹었습니다. 그 형제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잘 알았고, 유머 감각이 탁월했으며, 저의 많은 의심을 사려 깊이 받아 주었습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경험과 관찰에 투영된 지적인 의심들로, 지워버리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친구들과 사랑하는 여인이 있었기에 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르네 지라르는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예수는 자급자족의 자동화 세계에 오시지 않았다. 모방이 가득한 세상에 오셔서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셨다.” 모방은 제 삶에서 중대한 부분이었지만, 저는 불완전한 사람들을 모방하고 있었고, 그네들 역시 불완전한 사람들을 흉내 내고 있었습니다. 불안정했습니다. 초월적 본보기가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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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린 창가의 정지된 삶〉, 후안 그리스, 유화, 1925.

    그러면 예수는 진정한 본보기가 될 수 있었을까요? 사랑은 관계에서 드러나는 것이어서 추상적인 대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추상적 대상이 저를 사랑할 수는 더더욱 없습니다. 복음서를 읽고, 아내나 친구들과 긴 대화를 나누고, 기도하고, 교회에 다니면서 그분과 관계 비슷한 것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일생 중 많은 부분을 큰 착각에 빠져 살았습니다. ‘나는 모든 것을 앞서 이해할 수 있다. 나의 비상한 머리는 조건들을 엄밀히 파악해서 명확한 조치를 찾아낼 수 있고, 내 생각은 행동을 대신할 만큼 훌륭하다’는 등.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는 모든 관계와 마찬가지로 사전에 이해할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예를 들어, 결혼 전에는 구속, 희생, 자유의 제한 등 모든 잠재적 단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것이란 경험 자체에 있어서 좋은 것을 미리 알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간관계에서 헌신이 선행되어야 하는 것처럼, 하나님과의 관계에 적극적이고 온전히 임하기 위해서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수년간 저를 끌어당기던 것에 복종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일체의 두려움과 망설임,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들을 극복하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눈부신 광채는 쏟아지지 않았습니다. 하늘도 갈라지지 않았고, 지금까지 제 삶의 대부분을 지배했던 의심과 이기심과 우유부단함이 확신으로 대체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그날그날 두려움과 떨림으로 일궈갔고, 영적 상태에 따른 의지와 희망으로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갈 뿐이었습니다. 차츰 은혜와 확신과 이해, 사랑, 인내, 의지와 균형이 삶에 들어와 구석구석을 비추며, 고통이면서도 생명을 주는, 구속이면서도 자유를 주는 방식의 변화였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저자이며 우리는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자유로운 참여자입니다. 우리가 가진 이 자유의지는 참으로 신비합니다. 우리는 살아계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소설 속 인물입니다. 자유롭고 운명적이며, 사랑으로 살면서 죽음을 향해 기울어진 신비로운 존재입니다. 그렇지만 우리 역시 생명을 지향할 때 창조적 능력과 수고를 축복하시는 저자의 형상을 닮은 작은 작가입니다.

    문학적 지식과 묘사는 이제 삶의 관계를 계속해서 더욱 깊어지게 하고, 경험을 더욱 풍부하고 역동적으로 밝혀줍니다. 이 모든 일 이후에 소설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는 허구의 의식이란 더는 광적으로 빠져들거나, 단순하게 몽롱한 쾌락을 추구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삶을 무시하지 않고 목적을 두고 관계하게 돕고, 믿음과 사려 있는 행동의 세계에 다시 들어가도록 의식을 밝혀줍니다.

    하나님은 궁극적으로 소설처럼 쉽게 해석하거나 읽을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관념이 아니라 간절히 바랄 때 모순된 의지의 감옥에서 우리를 해방하고 이 세상 너머의 현실을 알려주는 분입니다. 현재로 찾아오시고 과거로 돌아가셔서 구원하는 분입니다. 저의 고집과 주저함에 개의치 않으시고 새 삶을 주십니다. 

     

    _옮김: 들꽃처럼. Plough Quarterly 2024년 가을호 글. 한국어 판은 기사 제휴로 〈복음과 상황〉 홈페이지에 먼저 실렸던 글입니다.

     
    지은이 JordanCastro 조던 카스트로

    미국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 출신의 작가이자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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