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ight green moss on a rock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기술 문명 없는 삶의 기록

저자 마크 보일

January 24, 2020

다른 언어들: Deutsch,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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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한번쯤은 꿈꿔봤을 것이다. 조금 더 자연과 가까운 건강한 삶을 살고 싶다는 꿈, 정신없이 돌아가는 생활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꿈. 10년 전, 경제학자 마크 보일은 돈 없이 사는 삶을 시도했다. 그리고 2년 전, 그는 현대 기술의 모든 혜택으로부터 벗어났다. 우리는 마크 보일에게 물었다. ‘스마트’ 하기보다는 오히려 바보 같은 휴대폰을 던져 버리고, ‘사회적’이라는 이름으로 위장한 반사회적인 소셜 미디어를 끊은 이후, 그가 깨달은 것은 과연 무엇인지.

2016년 동지 전날 밤 11시경에 나는 노트북 전원을 빼고 휴대폰을 껐다. 이 세상에 영원히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들을 위해서였다. 나는 짚으로 만든 오두막을 완성하기 위해 마지막 손질을 했다. 그해 여름 내내 3에이커(약 3700평)나 되는 땅에 나는 오두막을 지었고, 먹고살기 위해 반쯤은 야생인 소규모 농지를 만들었다. 다음날 아침부터 나는 현대 기술 없는 새로운 삶을 시작할 작정이었다. 수도도, 화석 연료도, 시계도, 전기나 어떤 동력 장치도 없으니, 당연히 세탁기나 인터넷, 전화나 라디오도 없고, 심지어 전구조차 없는 삶이 될 터였다. 이런 삶은 때때로 목가적이며 낭만적으로 묘사되기도 하지만 나는 그런 환상은 없었다. 한 예로, 나는 체인톱, 전동 기구나 트랙터 없이 직접 땅을 일구며 살기로 했으니, 낭만과는 한참 거리가 먼 일이었다.

다음날 일어났을 때 내 감정은 조금 복잡했다. 한편으론 내 삶이 가장 원초적으로 축소되어 이젠 어떤 청구서와 고지서의 압박도 없다는 해방감을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현대 문명과 완전히 단절되어 내가 이제껏 알아왔던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실감이 몰려왔다. 사실 그땐, 산업화된 세상에서 모든 플러그를 뽑아버리면 현실과의 모든 접촉을 잃게 될지, 아니면 진정한 삶의 실체를 만나게 될지 통 가늠할 수가 없었다.

돈 없이 산다는 것

8년 전에 나는 돈 없는 삶을 시작했는데, 사실 처음엔 인류학자들이 ‘선물 경제’라고 부른 방식을 일년 동안 실험하겠다는 의도에서 출발했다. 나는 선물 경제가 가능할지, 가능하다면 어떻게 나타나며 느껴지는지 보고 싶었다. 결코 가벼운 결정은 아니었다. 나의 경제학적, 사업적 지식과 경험을 통한 냉철한 결론이었다. 그 결정은 생태적, 지정학적, 사회적 그리고 문화적 해악의 중심에는 인간이 소비하고 있는 자원들로부터 인간 자신이 극단적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문제가 존재한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돈은 우리가 소비하고 있는 방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눈으로 확인할 기회를 절대 허락하지 않는다. 소비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그 실상을 모르면 모를수록, 자연과 인간을 학대할 가능성은 더 높아지기 때문이다.

Bright green moss on a rock

사진 Irene Mei. 작가의 허락을 받아 사용

하지만 나는 돈을 포기함으로써 탐욕스러운 자본주의의 손아귀에서 해방되기는 했으나 산업주의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 당시에 나는 태양 전지판으로 내 LED, 노트북, 기계 장치 등에 동력을 공급했는데, 이 물건들은 오직 통화 체계와 산업화된 경제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나는 점점 이 상황이 불편해지기 시작했고, 우리가 당면한 많은 위기 집합체의 핵심에 단지 통화 경제와 자본주의 문제만 있는 것은 아니라 는 사실을 깨달았다. 산업주의 또한 그 주범이었다.

요즘 들어서는 내가 왜 산업 문명을 거부하는지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이미 산업화된 삶의 실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 폐해를 몰라서 이런 방식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다. 몇가지만 언급해 보자. 종의 대량 멸종, 자원 전쟁, 문화 제국주의, 기후 재앙, 광범위한 사찰, 표준화, 미개척지와 원주민 터전의 식민화, 공동체의 분열과 필연적인 불평등을 가져오는 수백만 직종의 자동화, 실직과 고용 불안정, 맹목적인 갈망(허위 선동가에게 권력 쟁취 기회를 풍성히 제공하는), 정신 건강의 극심한 악화, 암이나 심장병, 당뇨, 우울증, 자가면역질환, 비만과 같은 질병이 산업적 규모로 급증하고, 스크린 위의 허상을 쫓는 중독(영상, 포르노, TV프로그램, 신상품, 연예인의 사생활, 온라인 데이트, 연중무휴 뉴스) 등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수익을 창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사안들은 여전히 어마어마한 문제다. 그러나 놀랍게도 시간이 흐르면서 내 이유는 천천히 바뀌었다. 산업 문명을 거부하는 내 삶의 방식은 세상을 구하는 일과는 점점 상관이 없어지고, 오히려 세상 사는 참맛을 구하는 일이 되어가고 있다. 세상은 맛있어질 필요가 있다.

날 것의 뼈다귀

나는 생의 맥박을 다시 느끼게 되길 원했다. 악의 요소들을 감지하고 불합리를 벗겨낸 다음 아무 찌꺼기도 남지 않도록 존재 자체의 뼈다귀를 핥고 싶었다. 피상적인 수준이 아닌, 진정한 친밀함과 우정, 그리고 공동체를 깊이 체험하고 싶었다.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보내는 대신 내 삶을 살리고 싶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살아 움직이는 동물, 생명으로 충만한 인간이 되고 싶었다. 추위와 배고픔과 두려움을 모든 세포로 느끼고 싶었다. 단지 살아있다는 표시만이 아니라 정말로 살고 싶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조용하고 단호하게 깊은 숲으로 들어가, 한때 내 먹이가 되어준 대지의 생명들에게 이제는 내 육신을 그들의 먹이로 내어줄 준비를 하고 싶었다. 까마귀는 내 눈을 파먹고, 여우는 내 얼굴을 물어뜯으며, 들개는 내 뼈를 으깨고, 솔담비는 내 넓적다리를 유용한 식량으로 취할 것이다. 난 이것이 공정하다고 생각했다.

A campfire in the woods

사진 잰드로 밴드웨일 (퍼블릭 도메인)

이쯤 되면 누군가는 나를 심각한 피학적 성향(마조히즘)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탓하진 않겠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진실은 정반대에 가깝다. ‘포기’ ‘~없이 살기’ 혹은 ‘끊기’ 같은 말은 항상 뭔가를 제한 당하고 금욕하는 상태로, 얻기보다는 잃게 되는 일처럼 들리기 십상이다. 알코올 중독치료를 ‘건강과 좋은 인간관계를 얻는 것’으로 보기보다는 ‘술을 포기하는 것’으로 본다. 내 경험에 의하면 잃고 얻는 것은 살면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의식하든 못하든 우리는 매순간 선택하면서 살고 있다. 내 삶을 통틀어 나는 돈과 기계를 선택했고 그 선택의 이유는 의심의 여지없이 합당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돈과 기계가 대체한 것들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지만 우리 스스로에게 전혀 묻지 않는 질문이 있다. 우리의 짧고 소중한 인생에서 자신의 길을 찾아 나아갈 때 무엇을 잃을 준비가 되어 있으며, 무엇을 얻길 원하는가?

복잡해지기

내가 적용한 이런 방식의 삶을 종종 ‘단순한 삶’이라고 부르는데, 알고 보면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개념이다. 실상은 상당히 복잡하다. 천 가지의 단순한 일들로 이루어진 복잡성이다. 반대로, 도시에서 살았던 과거의 내 삶은 아주 단순했지만 천 가지의 복잡한 것, 그러니까 스마트폰, 플러그, 플라스틱 같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산업 문명의 무수한 기술들이 복잡해진 댓가로 우리의 삶은 아주 단순해졌다.

지나치게 단순해져서, 나만해도 복잡한 기계들 덕택에 매일 똑같은 일을 하기가 지루해졌고, 심지어 그 기계를 제조하는 사람들도 지루하지 않을까 의심스러웠다. 물론 내가 산업기술을 거부한 이유가 지루함 때문만은 아니다. 전원 스위치, 버튼, 웹사이트, 차량, 기기, 오락, 애플리케이션, 전동 기구, 새로운 편이 장치, 서비스 공급자, 편리한 도구, 편의 시설들 속에서, 나는 스스로 하는 일이 거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이것들을 얻기 위해 돈 버는 일만이 유일하게 내가 하는 일이었다. 커크패트릭 세일이 “휴먼스케일(Human Scale)”에서 이야기했듯이, 나의 바람은 “단순해지기가 아니라 복잡해지기”가 되었다.

산업화된 세상에서 모든 플러그를 뽑아버리면 현실과의 모든 접촉을 잃게 될까, 아니면 진정한 삶의 실체를 만나게 될까?

수돗물, 전기, 기계 없이 살면서 내 생활은 확실히 훨씬 복잡해졌다. 양변기 없이 사는 나의 하루는, 통에 모인 배설물을 퇴비장에 쏟아붓는 일로 시작된다. 참고로 이렇게 퇴비장에 모인 인분은 거름이 되어 18개월이 지나면 음식물을 재배하는 데에 사용된다. 그 다음엔 샘으로 가서 그날 씻고 마실 물을 떠온다. 돌아오는 길에 이웃을 만나 이야기를 나눈 후, 그날 필요한 여러가지를 한다. 사과주를 만들고, 숲에서 통나무를 날라오고, 그 통나무를 도끼로 자르거나 쪼개고, 먹을 풀이나 열매를 구해오고, 채소밭에 거름을 주고, 나무를 심고, 차에 치여 죽은 꿩이나 사슴을 보면 가져와 가죽을 벗기고, 씨를 심고, 허브 화원에 잡초를 뽑고, 호수에 가서 설거지와 빨래를 하고, 나무를 깎아 숟가락을 만들기도 한다. 이외에도 현대성이 나에게 해주었던 수많은 일들을 이제는 내 손으로 직접 하고 있다.

사람들이 ‘단순한 삶’이라고 할 때 의미하는 바는 모든 것의 복잡하지 않은 본질일 것이다. 맞다. 거기엔 시간을 초월한 단순함이 있다. 산업문명이 우리 주위에 진공포장 해놓은 플라스틱을 벗겨냈을 때 남은 것은 더할 나위없이 단순하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건강한 음식.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것. 신선한 공기. 소속감과 살아있다는 실감. 좋은 물. 가치 있는 목적. 친밀감. 활기차고 깊은 삶의 정수. 나는 너무 많은 세월 동안 이런 것들 없이 살았다.

우리가 열망하는 것 중 하나는 다른 사람들과의 깊은 교감이다. 내가 복잡한 현대 기술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심했을 때, 처음 가졌던 가장 큰 걱정은 내가 가족, 친구, 사회로부터 격리되지 않을까였다. 어쨌든 요즘 세상은 스마트폰, 웹사이트, 이메일, 소셜 미디어를 통해 조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게 입증되었다. 지금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편지로 연락을 주고받는데, 편지는 이메일이나 문자 전송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생각과 표현을 가능하게 해준다. 나는 소셜 미디어를 포기한 이후로 내 이웃과 친구들과 더 잘 지내고 있다. 또한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소규모 농지에 있는 작은 무료 호스텔에 와서 머물곤 한다. 그리고 중요한 건,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시간만큼 나는 야생의 생명체들과 어우러진 풍경 속에서 고요하게 성찰하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는 점이다.

내가 먹는 것

음식과 나의 관계가 바뀌면서 나를 둘러싼 세계가 정말 극적으로 바뀌었다. 내가 돈 없이 살기를 실천했을 때, 나는 10년 동안 동물 보호 운동가였고 엄격한 비건(채식주의자)이었다. 이제 나는 내 주위의 자연으로부터 먹을 것을 구한다. 대부분의 저녁식사는 직접 낚은 강꼬치 고기나 송어, 채취한 풀이나 나무 열매, 내가 기른 감자, 채소, 샐러드로 이루어진다. 가끔 차에 치여 죽은 사슴, 꿩, 비둘기를 발견하게 되면 그것들도 상에 포함된다. 모두가 맛있다고 할 만한 식사는 아니다. 하지만 내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이것을 먹는 게 어떤 결과를 낳는지 안다. 또한 내 생명을 유지하는 일이 이 야생의 자연과 깊이 교감하는 친밀감에 달려 있다는 자각이 너무도 생생하다.

hands holding a speckled trout in water

사진 헌터 브루멜스 (퍼블릭 도메인)

이러한 변화가 쉽지는 않았다. 나는 동물들을 사랑하는데도 먹어야만 하는 꺼림칙함을 감수하면서 그들의 목숨을 취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어느 날 아침에 텃밭 가꾸기를 한다면 일 년 동안 물고기를 잡은 것보다 더 많은 흙 속의 생명들을 해치게 된다.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잔인함에 반대하지만, 죽음에 대해서는 아무 갈등도 없다. 죽음은 곧 삶이다. 죽음이 없이는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단지 죽음의 규모, 그리고 죽음이 부여하는 단절만이 문제다. 또한 나는 전에 소위 ‘비건’이라고 부른 삶이 결코 ‘비건’적이지 않다고 느꼈다. 자동차도, 전화도, 플라스틱도, 비타민 영양제와 단백질바도, 병아리콩과 두유와 삼씨, 그 무엇도 비건이 아니다. 전혀 아니다. 이 모두는 정치적 이념의 수확물로서 ‘제6의 대멸종’을 일으킨다. 우리 주변 세계를 오염시키며 연이어 서식지를 쓸어버리고 많은 생물들이 지구상에서 더 이상 살 수 없도록 만들어 버린다. 물론 인간도 예외는 아니다.

시계로부터의 자유

현대 기술의 혜택을 포기했을 때 나는 시간의 구분 또한 없애 버렸다. 계절에 따르는 시간의 변화와 피할 수 없는 낮과 밤의 자연적 리듬을 말하는 게 아니고,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 말이다. 시계 없이 산다는 게 허황되고 비현실적이며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는 것은 알지만, 사실 이것은 내가 원했던 삶의 방식의 핵심을 보여준다. 제이 그리피스가 시간에 대해 깊이 탐구한 책 《시간 밖의 시간》(당대)은 나의 생각을 더욱 공고히 해주었다. 시계로 구분된 시간의 개념은 현대의 산물이며 그것이 얼마나 이념적이고 정치적인지를 이 책은 이야기해 주고 있다. 시계로 구분된 시간은 산업의 중심이다. 대량 생산, 특화되고 분화된 노동, 경제 규모와 표준화를 만들어낸 것이 시계의 시간이다. 그러니까 내가 벗어나고 싶었던 것은 시계의 시간에 얽매인 모든 것들이다. 그리피스의 시적인 표현을 빌자면, ‘그리니치 표준시(Mean Time)’는 ‘가장 비열한 시간(Meanest Time Of All)’이다.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하루하루를 보내는 대신 내 삶을 살리고 싶었다.

시계가 없으니 시간과 나의 관계는 극적으로 달라졌다. 뭐든지 더 오래 걸린다. 전기 주전자로 3분만에 차를 끓이는 일도, 빵과 피자를 사러 슈퍼마켓에 후딱 다녀오는 일도 없어졌다. 그런데도 이상한 건 내 시간은 더 많아졌다는 사실이다. 연필로 종이에 글을 쓰니, 모니터 상의 낚시 글이나 광고에 방해 받는 일이 없어졌다. 삶은 훨씬 여유로운 속도를 갖게 되었고 스트레스도 덜 받는다. 이제 나는 계절의 리듬뿐 아니라, 내 신체 본연의 리듬을 느낀다. 자명종소리 대신 새들의 지저귐 소리에 잠이 깨니 이보다 더 좋은 단잠이 없다. 만일 내가 오늘 하려고 했던 일을 모두 관두고 산행을 하고 싶다면, 그냥 그러면 된다. 마침내 나는 ‘지금 여기에 존재’ 하는 걸 배웠다. 삶은 더 다양해졌고, 쳇바퀴 같은 반복은 줄어들었다. 이곳에서 깨어있는 마음으로 산다는 건, 더 이상 영적인 사치가 아니라, 경제적인 필요다. 이 생활은 직업상 경력을 쌓는 데는 별 도움이 안되겠지만, 나의 궁극적인 목표, 즉 행복을 위해서는 최고의 길이다

단순함의 낭만화?

이러한 생활에서는 어떤 일도 쉽지 않았다. 정말로 쉽지 않다. 전화가 없으니 멀리 있는 가족이나 친구에게 전화를 걸 수도 없고, 친구와 술 한잔하고 싶어도 메시지를 전송할 수 없다. 알루미늄 욕조 안에 쭈그려 앉아서 물 주전자로 물을 부어가며 빨래를 한다는 게 비낭만적으로 들린다면, 맞다, 정말 낭만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런 방식의 삶이 나름대로의 패턴, 오래되어 잊혀진 해법을 갖고 있다는 걸 배웠다. 끝없이 밀려드는 이메일, 문자, 전화 대신에 나는 하루에 한두 통의 편지를 받는다. 이 편지들은 나에게 참 소중하다. 언젠가 나는 야외에 온수 욕조를 지었다. 밤하늘의 별빛 아래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고 손수 만든 블랙베리 와인을 마시는 게 낭만적으로 들린다면, 맞다, 정말 낭만적이다.

나는 소셜 미디어를 포기한 이후로 내 이웃과 친구들과 보다 잘 지내고 있다.

하나를 포기하면 다른 하나가 주어진다는 걸 나는 깨달았다. 음악을 예로 들면 영원히 죽지 않는 세상인 텔레비전과 라디오와 인터넷을 끊자, 마치 내가 좋아하던 세상의 유명한 아티스트들이 한꺼번에 죽어버린 것 같았다. 보위도 사라지고 조니 미첼도 사라졌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슬픔이 닥쳐왔다. 하지만 전자 기기를 통해 듣는 음악이 끊어지자, 직접 연주하는 전통 음악 세션을 듣게 되었는데 이제는 그 음악을 아주 좋아한다. 심지어 나 자신이 악기를 연주한다. 비록 엉망이긴 하지만.

나는 과거를 낭만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미래를 낭만적으로 보지도 않는다. 나는 기술 문명을 누리면서도 살아 보았고, 없이도 살아 보았다. 그러니 어느 쪽이 나에게 평화와 만족을 주는지 안다. 알도 레오폴드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모두는 안전, 풍요, 편안함, 장수를 누리며 둔감해지기를 원한다.”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지 않으면서 오래 사는 건 너무 쉽다. 안락함과 충만한 삶 사이의 끊임없는 실랑이 속에서, 내 평생 바라는 이상적인 삶을 위해서는 그 절충점을 찾을 수 없었다. 나는 이제 이 세계의 모든 정서와 구성 요소 전부를 느끼고 싶다. 빗방울, 환희, 경이, 이 모든 것을 말이다.

지은이 Mark Boyle

마크 보일은 <가디언> 지에 기고하고 있으며, “본향으로 가는 길: 기술 문명 없는 삶의 이야기(The Way of Home: Tales from a Life without Technology)”의 저자이다. 본 글은 이 책에 기반하고 있다. 마크 보일은 현재 아일랜드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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