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untains against a pink sky

두려움 너머로

절망의 끝에선 모든 영혼에게 평안과 힘을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March 20, 2020

다른 언어들: español,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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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가 쓴 «두려움 너머로»에서 더 읽으실 수 있습니다.

80 대 후반의 나이에도 나의 장인 한스는 유럽으로 여행을 가셨다. 역사와 종교에 큰 관심을 갖으셨던 장인은 나이 때문에 컨퍼런스나 여행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관심 분야의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라면 장거리 여행이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아무리 장시간 여행을 해도 장인은 지치기는커녕 오히려 더 힘이 솟는 듯했다. 그걸 아는 가족 중의 한 사람은 장인이 일하다가 돌아가실 거라고 말하기도 했다.

1992년 성탄절 전 날, 아흔 살의 장인은 어깨에 양치기 외투를 걸치고 손에 나무 막대기를 쥔 채 건초 더미에 앉아 해마다 야외에서 하는 예수 탄생극에 참여하고 있었다. 장인은 전에도 여러 번 그 연극에 참여한 경험이 있었다. 연극 중 몸에 한기를 느낀 장인은 집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한 형제가 장인을 차에 태우고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집으로 가서 장인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부축하려고 차 뒷문을 열었다. 그런데 장인은 이미 영원히 눈을 감은 뒤였다.

친구나 가족을 느닷없이 보내는 것은 언제나 큰 충격이다. 하지만 이미 죽음을 생각할 나이가 되었고, 충만한 삶을 살아왔다면 그런 죽음은 축복이 될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선택할 수만 있다면 장인처럼 순식간에 그리고 행복하게 최후를 맞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죽음은 언제나 서서히 찾아온다.

“남편이 세상을 떠났을 때 누군가가 이 아름다운 책을 제게 주었더라면…”-매들렌 렝글, «시간의 주름»(문학과 지성사)의 저자

죽음은 언제나 힘겨운 싸움을 동반한다. 거기에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안에서 오는 두려움도 있고, 남겨진 책임을 다하고 싶은 초조, 과거 잘못이나 죄에서 벗어나고 싶은 후회 등이 있다. 거기에는 또한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는 생각에 대한 본능적인 저항도 있다. 그것을 생존 본능이라고 부르든, 삶에 의지라 이름 붙이든 간에 뿌리깊은 인간의 원초적인 힘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기에 그 힘이 죽어 가는 사람에게 놀라운 쾌활성을 불어넣기도 한다.

rowboat on a lake in the mountains

2년 전 90대 중반의 모린 할머니는 넘어져서 엉덩이 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그리고 나서 바로 여동생이 세상을 떠났고, 큰아들이 그 뒤를 이어 세상을 떠났다. 할머니는 잠깐 휠체어에서 보내는 시간을 빼고 나면 하루 종일 거의 침대에 꼼짝없이 묶여 지내야 했다. 그럼에도 방문객 커피 속에 고무로 만든 쥐를 몰래 집어넣길 좋아하는 이 ‘억센 늙은이 새’(본인의 표현대로)는 어떤 젊은이보다 생기가 넘쳐 흘렀다. 2000년까지 살겠다는 목표를 달성한 할머니는 이제 100살까지 살 계획이라고 농담 삼아 이야기한다. 할머니는 자신의 나이에 온 몸과 마음으로 저항하면서 생명력을 꺼지지 않게 했다.

나의 여동생의 의붓딸인 에스더는 10살 때 암에 걸렸다. 줄넘기와 술래잡기를 좋아하고 아버지와 함께 말타기를 즐기던 이 아이는 침대에 누워 꼼짝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후 에스더는 다리 하나를 절단해야 했다. 에스더는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금방 마음을 잡고는 의족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크리스마스까지는 반드시 걸을 거예요. 두고 보세요.” 에스더는 다짐을 했다. 얼마 후 에스더는 시력까지 잃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주저앉지 않았다. 에스더는 그동안 해오던 피아노 레슨을 중지하지 않았다. 에스더는 명랑하고 쾌활하게 암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다.

사람은 살려는 의지만 있다면 아무리 힘든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 하지만 죽음은 인간이 어찌 해볼 도리 없는 것이며, 인간의 육체에는 반드시 마지막이 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대 문화는 이 진실을 거부하려고 애쓰는 것 같다. 플로리다 주(州)에서는 수천 명의 은퇴한 노인들이 함께 모여 춤추고 짝을 만나고 운동하고 일광욕을 즐긴다고 한다. 또 젊은이 같은 피부를 만들기 위해 엄청난 돈을 써가면서 성형수술을 한다고 한다. 모두가 인생의 재미를 누리고 ‘충만한 삶’을 살기 위해 열광적이었다. 하지만 실제 나이는 70대인데 20대인 양 행세하면서 마치 주름과 심장병과 요실금과 기억력 감퇴 같은 것은 자기와는 상관없다는 듯한 모습은 어쩐지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과거에는 전염병과 기근이 마을이나 도시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갔고, 아기를 낳다가 산모가 죽거나 아니면 아기가 죽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필립 얀시는 “어떤 인간도 죽음을 만나지 않을 것처럼 살 수 없다.” 라고 말한다. 요즘에는 현대 의학과 풍부한 식량, 공중 보건 향상, 수명 연장으로 인해 죽음이 그렇게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아닐 수도 있다는 착각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있는 것 같다. 필립 얀시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헬스클럽이 성행하고 있다. 건강 음식점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에게 건강은 거의 종교처럼 되었다. 그런 한편, 죽음을 기억나게 하는 것들―영안실, 말기 환자 병동, 공동묘지―을 어떻게든지 감추고 숨기려고 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일상의 삶 전반에서 죽음을 제거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실제로 죽음이 찾아왔을 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까지 상실하고 말았다. 내 말은 죽어 가는 사람의 두려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어떤 전문가들이 그러듯이, 죽음을 친구처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관점이 그렇듯이 죽음은 하나의 적임엔 틀림없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 하나님의 손이 보호해주시기를 간구하는 시편 기자처럼,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고 피하고 싶어 한다. 확신 속에 죽음을 맞았던 헤르만 숙부조차도 그렇게 되기까지 심한 몸부림이 있었으며, 마치 길고 깜깜한 터널 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다며 두려움을 털어놓았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책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참 특별한 힘이 있습니다.”- 데임 시슬리 손더스, 호스피스 운동의 설립자

지금까지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을 어떻게 위로할 것인지에 대해 많은 말을 했지만,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마다 아픔이 다르고 필요가 제각기라는 것이다. 어떤 이는 신경이 날카롭고 수다스러워지는가 하면 어떤 이는 말이 없어지고 부루퉁해진다. 의기소침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과 협상을 벌이는 사람도 있고, 침착한 사람도 있다. 다 정상적인 반응들이며 좋다 나쁘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이다. 죽음으로 가는 과정은 매우 복잡한 과정이며 두려움과 불안, 절망과 함께 희망과 평안이 어지럽게 뒤얽힌 인간 감정의 스펙트럼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런 감정들은 죽어 가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주위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치기 마련이다.

Be Not Afraid Korean 병과 고통의 공포: 두려움 너머로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환경이 무척 중요하다. 병원은 수술에서 회복하는 데는 최적의 장소이긴 하지만 죽음을 맞기에는 결코 이상적인 곳이 못 된다. 무엇보다도 집이 줄 수 있는 편안함과 친밀함에는 못 미친다. 게다가 집에서만큼 문병객이나 친구 가족의 방문이 자유롭지 못하다.

가끔 병원과 집 간에 선택은 보통 어려운 게 아니다. 어떤 환자에게는 병원의 최첨단 설비가 안도감을 주지만, 어떤 사람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전선들과 끝없이 삑삑거리는 모니터들 때문에 잠을 못 이룰 만큼 혼란을 겪기도 한다. 어떤 경우건 환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서 의사와 솔직하게 대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혹 의사가 환자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거나 오해를 하는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중요한 것은 환자 자신이다. 최근에 의학 기술은 놀랍도록 발전하긴 했지만, 생명을 연장했다기보다 죽음의 과정을 연장한 측면이 더 많은 것 같다. 실제로 둘을 가르는 선은 매우 희미하다.

«마지막 선물»의 공동 저자이면서 호스피스 간호사인 매기 콜래너는 죽어 가는 사람이 겪는 정서적인 문제는 병 자체보다 훨씬 고통스러운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때 그들은 불안에 휩싸이게 되며 죽음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한 베트남 참전 군인을 간호했던 일을 떠올리면서 그녀는 이렇게 적고 있다.

하루는 당직 간호사에게 전화가 왔다.

“빨리 오셔야겠어요. 거스 환자가 심한 불안 증상을 보이고 있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냐, 마침내 일이 풀리는 거야.” 나는 거스가 얼마나 오래 자신의 강한 이미지를 버텨낼 수 있을지 궁금해 하고 있던 차였다. 언젠가는 거스가 두려움에 휩싸일 때가 올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병원에 도착했더니 사태가 심각했다. 거스는 고뇌 속에서 울부짖으면서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간헐적으로 내뱉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는 ‘마을’, ‘아기들’, ‘네이팜탄’ 같은 단어들이 고통스런 울부짖음과 함께 튀어나왔고, “내가 그랬어, 내가 그랬어!” 라는 비극적인 절규가 쏟아져 나왔다.

간호사들은 거스가 원목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고 급히 연락을 했다. 그리고 잠시 후 거스는 목사에게 자신의 짐을 털어놓은 뒤 편안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어떤 경우에는 이들 죽어 가는 사람들의 혼란과 고민이 다른 사람들이 아무도 자신들이 겪는 고통을 몰라준다는 것에 기인하기도 한다. 이런 두려움은 주변에 가족과 친구들이 얼마나 많이 있느냐와 상관이 없다. «마지막 선물»을 다시 한번 인용하자.

죽어 가는 많은 이들이 외로워하는 것은 방문객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방문객이 찾아왔을 때 벌어지는 일들 때문이기도 하다. 몇몇 병문안 온 사람들은 날씨나 스포츠나 정치 같은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허비해 버린다.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그들의 잡담은 환자들이 마음속 깊은 이야기를 못하게 방해한다. 그로 인해 죽어 가는 사람의 세계는 움츠러들게 된다. 자신들에게 일어나는 일에 대해 터놓고 말하지 못하게 될 때 이들은 애정과 관심을 가진 사람들 한복판에서도 외로움을 느끼게 된다. 그들은 고립되고 버림받았다는 느낌을 받게 되고 그 반응으로 분개하고 화를 내게 된다.

이제껏 죽음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봤지만, 나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거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지켜보는 사람에게 이 책을 선사하고 싶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 나의 죽음이 찾아왔을 때도 머리맡에 이 책을 두고 싶다.”- 폴 브랜드 의학박사,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물“»(비아토르)의 저자

수다나 농담도 기도만큼이나 필요하다. 부자연스러운 거룩함보다 억압적인 것은 없다. 하지만 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작은 사랑의 행동이다. 이마의 열을 내리는 물 수건, 떨리는 어깨를 붙들어주는 손길, 마른 입술을 적셔주는 물수건 등의 작지만 마음이 담긴 행위를 사람들은 삶의 마지막 순간에도 간절히 바란다. 사형수들을 죽음의 자리까지 동행했던 헬렌 프리진 수녀는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을 때조차도 그 사형수를 사랑의 눈길로 위로하는 사람이 적어도 한명은 있다는 것을 그 사형수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말한다.

종종 죽어가는 사람이 혼자 임종을 맞는 것만큼 불행한 일은 없다. 어떤 사람은 금방 눈을 감을 것 같다가도 몇 주 혹은 몇 달 지나가는 경우도 있고, 어떤 사람은 회복되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갑자기 세상을 떠나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몇 년 전 친구 롭이 죽던 날 그는 아내와 아이들을 방으로 불러서는 자신이 얼마나 그들을 사랑하는지 말하고는 앞날의 복을 빌어주었다. 그리고 몇 시간 후 그는 눈을 감았다. 또 다른 친구 브래드는 가족들과 작별 인사를 못하고 세상을 뜨고 말았다. 그가 아파 눕자 다 성인이 된 자녀들은 아버지를 보기 위해 먼 길을 달려왔다. 그리고 자식 중에 하나가 곁에 남아 임종 전에 다른 식구들을 부르기로 하고 되돌아 갔다. 하지만 막상 임종은 너무 빨리 닥쳤고 대부분의 자식들은 곁에 없었다. 그 일로 인해 가족들은 깊이 괴로워했고 죄책감까지 느낀 자식들도 있었다.

그들을 위로하면서 나는 우리가 임종을 지키건 못 지키건 죽음의 순간에는 어떤 이도 혼자가 아니라고 말해 주었다. 죽어 가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과 함께 있다고 나는 믿는다.

암으로 죽은 환자와 마지막 밤을 보냈던 한 의사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간간이 혼란스러워 하긴 했지만 마크는 힘겹게 숨을 들이쉬는 중간중간 말을 이어갔다. 그는 어디론가 ‘가는’ 것에 대해 말을 했다. “그래, 가도 돼. 예수님께서 인도하실 거야.” 내가 대답했다.

“하지만 너무 힘겨워요.” 그가 고통스럽게 대답했다.

“우리를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해 보렴.” 내가 말했다.

“그러려고 해요. 하지만 다음에는 뭘 해야 할 지 모르겠어요. 너무 낯설어요.” 그러자 그의 어머니가 말을 했다.

“그래, 우리보다 조금 앞서 가는 거란다. 그리고 나중에 그곳에 어떻게 갔는지 우리에게 알려다오.”

조금 있다가 마크는 아버지에게 성경을 읽어달라고 했다. 로마서 8장을 다 읽자마자 마크는 말했다. “예수님이 오시겠죠.” 우리 중 몇 명이 입을 모아 대답했다. “그래, 반드시 오실 거야.” 그리고 잠시 후 마크는 매우 큰 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기다릴 수가 없어요!”

그 뒤 30 분간 마크는 심하게 숨을 헐떡였고, 그러면서도 몇 분 간격으로 뭔가를 말하려고 했다. 어떤 때는 한 단어였다가 어떤 때는 한 문장을 말하기도 했지만 급하게 내뱉는 말이라서 알아듣기가 어려웠다. 그는 눈을 뜨고는 있었지만 더 이상 우리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엄청난 싸움이… 내가 얼마나 힘든지 모를 거에요…. 불쌍한… 영적인 것에… 집중하세요.” 나중에는 이런 말을 했다. “가야 돼요…. 예수님이… 너무 놀라워요.… 너무 생생해….”

잠깐 멈추더니 마크는 말을 이었다. “전 정말 힘들어요. 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우리는 아무리 후회스러운 일을 했어도 다 용서받았다고 위로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도하실 거라고,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해주었다. 그런 뒤 마크는 물을 달라고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곧 떠나야 돼요…… 내 생애 가장 좋은 날……”

그리고 약 한 시간 반 후에 그는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

마크의 이야기가 보여주듯이, 죽음이란 우리가 경외감 가운데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신비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살기 위해 싸운다면 우리는 그를 도와 같이 싸울 수 있다. 그리고 그가 죽을 준비가 돼 있다면 그를 이해한다고 위로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범위를 넘어서면 우리는 비켜서 있어야 한다. 내가 이것을 말하는 이유는 죽어 가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평화로운 분위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만 집중하고 죽어 가는 사람의 고통을 덜려고만 애쓴다면 오히려 그를 방해하고 혼란스럽게 만들며, 평안을 발견하지 못하게 막는 꼴이 될 수도 있다.

삶이 막을 내리려 할 때는 어떤 중요해 보는 것을 포함해 모든 것이 꺼져 버리게 된다. 그리고 모든 것이 꺼졌을 때 중요한 것은 영혼의 상태다. 우리는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다. 그리고 그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서 있는지 걱정해도 소용없다. 하지만 죽어 가는 사람이 겪는 것에 우리 눈과 귀를 열어 그의 고통을 우리의 고통으로 느끼면서 그 고통에 동참할 수 있고, 그가 자비와 은혜를 찾도록 기도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헨리 나우웬의 말처럼, “죽음이 최종적 권한을 가지지 않는다. 우리는 그들을 바라볼 수 있다…… 그리고 그들에게 소망을 주며, 그들의 몸을 안아 줄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보다 강한 팔이 그들을 인도하시고 그들이 간절히 바라는 평안과 기쁨을 줄 거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라는 것을 믿고 죽어 가는 사람을 고이 보내주어야 한다.

지은이 Johann Christoph Arnold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저자는 결혼, 부모역할, 교육, 노년 등을 주제로 활발한 저작, 강연 활동을 했으며, 기독교 공동체 브루더호프에서 목사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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