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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rning over the bay

    평화를 위해 싸우다

    지크프리드 엘벵어 (Siegfried Ellwanger) 의 삶을 돌아보며

    - 크리스 짐머만 (Christopher Zimmerman)

    2010년 09월 28일 화요일

    다른 언어들: Deutsch,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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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9월 19일, 지크프리드(Siegfried Ellwanger)는 여든 여섯의 생을 마감했다. 그를 알고 지냈던 사람들은 그의 이름이 지니고 있는 뜻(평화의 전사)이 그가 살아온 삶과 얼마나 깊은 연관이 있는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그 세대의 많은 독일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크프리드도 역시 열 살 때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했다. 그곳에서 그는 집단의식과 동지애를 느끼며 자라났다.

    "우리는 제복을 입고 깃발을 흔들며 행진하곤 했지. 팡파레도 울리고 북도 치면서 말이야. 같이 캠핑도 가고, 횃불을 들고 행진하기도 했고, 담력 시험도 했어. 해가 제일 길어지는 하지에는 축제도 벌였지. 우리의 모토는,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였어. '자신에 앞서 다른 사람을 섬기자'는 구호도 있었는데, 그런 구호들이 우리에게 열정을 불어 넣었어. 총통(히틀러)과 새로운 독일을 위한 그의 계획에 대해서도 배웠지. 우리가 봤던 애국 영화들은 어린 우리의 영혼 깊은 곳까지 흔들어 놨어. 우리는 조국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야 된다고 배웠어. 나라를 위해 죽을 수도 있다고 자랑스럽게 웃으며 말하곤 했지. 이보다 더 위대한 게 어디 있겠어?"

    나치즘의 음흉한 면은 그늘에 가려져 있었다. 같은 반에 있던 유태인 친구가 사라졌다. 유태인 의사 가족 역시 실종됐다. 하지만 지크프리드는 다른 많은 소년들처럼 정부의 설명을 듣고 더 이상 걱정하지 않았다. "우리는 유태인들이 해외로 이사를 갔거나, 노동 수용소로 일하러 갔다고 들었어." 어쨌든 그처럼 불편한 이슈들은 곧 인플레이션, 대량실업, 정치적 불안과 같은 문제들에 의해 묻혀버렸다. 히틀러는 사람들에게 그와 같은 문제들을 꼭 해결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열여덟 살이 되던 해, 군대에 징집되어 전쟁터로 향하는 지크프리드의 귓전에는 "독일 제국의 영광과 힘을 위하여!"라는 히틀러의 소집 명령이 맴돌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1942년 12월에 그는 무기를 실은 마차를 앞세워, 동부 전선의 스탈린그라드(Stalingrad)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영하의 추위 속에 눈은 무릎까지 차 올랐고, 바람은 살을 에는 듯했다.

    Siegfried in Russia in 1943

    파괴된 마을, 버려진 농장, 동상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지크프리트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개울을 가득 매운 러시아 젊은이들의 시체는 구토를 일으킬 만큼 끔찍했다. "도대체 이 사람들이 내게 무슨 잘못을 했지?", "왜 이 사람들은 이렇게 죽어야 하는데?"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얼마 후, 그의 동료가 적군 소대를 생포했다. 지크프리드가 포로들을 대하며 충격적으로 깨달은 사실이 있었다. 그가 교육받은 대로라면 적군은 인간 이하의 괴물이어야 했다. 하지만 실재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지크프리드는 그들의 목숨이 보존된 것에 대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총격전이 있기 전, 그는 하나님께 목숨을 지켜달라고 기도하곤 했다. (수년후, 지크프리드는 전쟁과 고통없는 미래를 상상할 수 없음에도 왜 자신이 그같이 기도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곧 그는 기도에 한 가지 약속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주님, 제가 살아남는다면, 올바른 방법으로 보답하겠습니다."

    전쟁이 끝나서야 그 약속을 지킬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그것도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지크프리드가 장티푸스를 앓고 있는 동안 러시아 전선에서의 임무는 종결됐다. 그곳에 있던 대부분의 독일군이 전사했던 것을 생각해 볼 때, 장티푸스가 그의 목숨을 살린 것과 다름 없었다. 장티푸스에서 회복되자 지크프리드는 프랑스와 벨기에를 잇는 전선으로 다시 보내졌다. 그는 40명의 대원들을 거느린 소대장이었다. 1945년 4월, 그곳에서 지크프리드는 미군에 의해 생포됐다. 이곳 저곳의 포로 수용소로 옮겨다니던 그는 마침내 프랑스의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져 1948년까지 수용되었다. 외로운 3년의 시간 동안, 전쟁터에서 보낸 수년간의 기억이 악몽처럼 그를 괴롭혔다. 전쟁이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악'이라는 그의 확신은 점점 깊어갔다. 그를 괴롭혔던 것은 단지 공습으로 파괴된 마을, 초점을 잃은 엄마들의 눈동자, 무수히 쌓인 건물 잔해들 같은 것만이 아니었다. 히틀러 정권이 매혹적인 선전으로 가장 사악한 체제를 감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는 구역질이 날 만큼 고통스러웠다.

    "이제 나는 처참한 현실을 보게 되었다. 수백만의 유태인들이 '열등한 사람들'이라고 불려진 무수한 사람들과 함께 고문당하고 정치범 수용소에서 처형됐다. 히틀러와 나치의 정체를 확인하고 그들에 대항한 독일 사람들 역시 목숨을 잃었다. 지금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의미일까?"

    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독일 사람들은 과거를 돌아보며, 단지 자신의 임무를 했을 뿐이라고, 역사의 흐름에 어쩔 수 없이 휩쓸렸던 것 뿐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지크프리드는 그와 같은 생각을 거부했다. 반대로, 그는 그의 과거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을 강하게 느낀 나머지, 포로 수용소에서 했던 강제 노동을 반성의 기회로 여겼다.

    "포로 수용소에서 보냈던 시간은 이전에 전쟁터에서 싸웠던 사람들과 까깝게 지낼 수 있는 기회가 됐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지만, 그 시간은 내게 큰 의미가 있었지. 사실, 난 그 시간을 전쟁에 참여한 것에 대한 참회의 시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어."

    전쟁의 상처가 독일 땅에서 사라지는 데는 사반 세기가 채 걸리지 않았다. 전후 복구에 힘쓴 독일에게 '양질의 삶'을 가능케 하는 '풍요로운 사회', '경제 기적'이라는 보답이 주어졌다. 이제 지크프리드는 아내 로나타와 두 아들을 둔 가장이 되었다.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일 수 있었던 시기였다. 벽돌 쌓는 직공에서 건축 사무실을 가진 토목 기사로 성공해, 시청의 건축과장을 맡게 되었다. 그와 로나타는 집과 차를 소유했고, 아이들을 데리고 휴가를 갈 수 있을 정도로 부유했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허전했다.

    Wedding of Siegfried and Renate in 1952

    "여러 해 동안 우리는 하나님을 찾았어. 우리 인생은 겉보기에 성공의 연속이었지. 사다리를 오르듯 계속 승진했고. 하지만 그게 인생의 전부일 순 없었어. 이렇게 깨닫고 나니, 우리 삶이 실제로 어떻게 바뀌어야 될까 생각하게 됐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계속 자문했어. 결혼, 가족, 직업, 교회 생활이 우리 인생의 전부일까? 어느 날 성경공부 모임에서 마가복음의 첫부분을 읽었어. 예수님께서 호숫가에 있는 몇 명의 어부들에게 말씀하셨지. '나를 따를라!' 그들은 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를 따랐어. 이 말씀에 우리는 충격을 받은 거야."

    1970년 초, 새로운 삶을 찾던 지크프리드와 로나타는 은퇴 뒤의 안락한 삶을 포기하고 뜻을 같이하는 친구들과 함께, 슈투트가르트 근처에 바시스게마인데(Basisgemeinde)라는 공동체를 시작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정돈되지 않은 매일 매일의 현실이었다.

    "우리는 우리집을 포함해 다른 공동체 멤버들의 주거 공간을 여러 사람들과 나눠쓰기 시작했어. 그리고 머지않아 재정도 공유하기 시작했지. 스스로 살아가기 힘든 사람들이 도움을 구하며 찾아왔어. 노숙자, 실직자, 알콜 중독자, 마약 중독자...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 한 두 사람이 아예 자기 직업을 포기하고 공동체에 머무르기 시작했어. 하지만 쉽지만은 않은 시간이었지. 너무 열정적이어서 이 일 저 일에 휘둘리기도 했어. 좋은 의도였지만 인간적인 노력이 너무 앞섰지. 사람들이 야망을 갖기도 하고 교만해지기도 했어. 그런 것들이 이제 막 시작한 공동체의 삶을 더욱 더 어렵게 만들었던 거야. 하지만 우리는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하고자 했지. 우리가 원했던 것은 참된 기독교의 산 증인으로 사는 거였어!"

    이토록 미숙한 공동체의 가장 오래된 멤버 중 하나였던 지크프리드는 제일 대담한 개척자이기도 했다. 로나타가 회상하기를, 한번은 공동체에서 십일조에 대해 토론을 하는데 지크프리드가 그의 지갑을 내어 놓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왕 나누려고 하면 다 나눠야지..."

    이제 바시스게마인데 운동은 성장해서, 독일에 두 개의 성공적인 공동체를 두게 되었다. 그 사이 지크프리드와 로나타는 '브루더호프'로 알려진 또 다른 공동체 운동에 부르심을 발견하고 합류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지크프리드는 그의 마지막 생애를 이전과 같이 열정적으로 보냈다. 체스 게임을 하며 젊은이들을 도전하고, 유럽 전역에 걸친 구도자들과 편지를 주고 받고, 집에 찾아온 젊은이들에게 인종차별과 국수주의, 군국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그리고 형제로 사는 삶과 정의, 평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쳐 주었다.

    Many young men carry Siegfried's casket

    지크프리드의 장례식 날, 그의 무덤을 덮기 위해 마지막 삽을 뜨던 중, 돌연히 전투기가 낮게 날며 굉음을 일으키고 지나갔다. 순간 장례식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그 소리에 깜짝 놀랐고, 작은 여자 아이 하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 소리가 아니었다면 아름답게 끝났을 장례식장의 평화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서로 대항하고 있는 생명과 죽음 사이의 싸움을 우리에게 다시 일깨워 주었다. 지크프리드의 인생 여정에서 수없이 마주쳤을 그 싸움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삶 속에 영향을 미치는 생명과 죽음의 세력은 우리에게 거듭해서 묻는다. "당신은 어떤 주인을 섬길 것인가?"

    Siegfried in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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