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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tail from Manansala's painting, Pounding Rice.

    예수를 따르는 영성

    We need to be honest – the Beatitudes clash with our human tendenc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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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06월 05일 금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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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독특하고 충만하게 자신을 드러내신 후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방법이 되었다(히 1:1-3). 16세기 급진적 개혁가인 한스 뎅크(Hans Denck)는 “매일의 삶에서 예수를 따르지 않는다면, 누구도 그를 진실로 알 수 없다”footnote라고 말했으며, 이는 아나뱁티스트 운동을 계승하는 자들이 계속해서 붙잡고 가는 신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의심없이 예수를 명확하게 따르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 영성의 가장 근본적인 요소이다.

    지난 세대에 칠레의 신학자들을 이끌었던 세군도 갈리리(Segundo Galilea)는 이렇게 표현했다.

    기독교 영성의 근원과 진정성은 우리 인간의 상황 안에 거하신 하나님을 따르는 것으로 존재한다. 그는 우리와 같은 역사를 가졌고, 우리와 같은 경험을 했으며, 결정하시고, 고난 받아야 할 이유에 자신을 헌신했다. 그는 성공과 기쁨과 좌절을 경험했고, 자신의 생명을 양보했다. 나사렛 예수인 이 사람은 죄를 범하는 것을 제외하고, 모든 면에서 우리와 같은 분이었다. 하나님의 모든 충만함이 예수 안에 거했다. 그래서 예수는 인간으로서, 기독교인으로서 우리 삶의 유일한 모델이다.footnote

    슬프게도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으로 영성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해 오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가톨릭 영성뿐만 아니라, 초기 개신교도 경배 받으실 최후 심판자 또는 하나님의 분노를 달래는 희생자로서의 예수의 신적 본성은 생각했지만, 일상에서 따라야 할 주님으로서의 예수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으로부터 내면의 관념과 내세적 영성이 출현한 것이다.

    다른 어떤 기독교 역사의 기간보다 우리 시대에 더 많은 순교자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팔복에 대한 현시대의 타당성을 인정하게 되며, 진정한 영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실천을 위해 팔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하지만 신약성서의 비전에 따르면 나사렛 예수의 말씀, 행동, 이상, 명령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의 길을 알려준다(요 14:5-11). 예수는 그의 인내심 있는 사랑과 긍휼 안에서 모든 것의 능력이 되시는 하나님의 진실한 본성을 나타냈다. 그리고 예수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삶을 위한 모델과 하나님의 다스림의 특징을 발견한다. 이것은 법을 엄격히 따르거나 비굴한 맹종(샌들을 신고, 목수로서 일하며, 순결을 지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예수의 태도, 성령, 가치 그리고 이 세상에서 그가 존재하며 행동하는 양식을 따르는 것이다. 진실한 기독교 영성은 일상의 제자도에 관한 구체적인 표현으로써, 관념과 내세적 영성이 출현한 것이다. 특별히 예수의 태도, 정신, 행동, 말씀을 받아들이는 양식에 집중한다.

    With hues of blue, green, yellow and orange, and in the cubist style, Manansala depicts a man and woman pounding rice.

    Vicente Manansala, Ang Magbabayo (쌀 찧기)

    하나님의 다스림에 관해 예수가 선언한 가장 좋은 요약 중 하나는 마태복음 5장에 기록된 팔복에서 찾을 수 있다. 산상수훈 전체를 통합한 이야기로써의 팔복은 예수의 가르침과 모범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불행하게도 수 세기 동안,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따르던 교회는 산상수훈의 가르침을 유토피아적인(이상적인) 특징으로 치부해 온 경향이 있다. 그래서 팔복의 가르침은 종교 체제(수도원 같은) 안에서 매우 극단적인 기독교 삶을 선택한 소수자들만이 따를 수 있는 “완벽한 조언”으로 여겨져 왔다.

    그러나 1세기 초대교회는 팔복을 새로운 제자들을 가르치는 데 사용했다. 그들은 분명하게 이 팔복의 가르침이 모든 신자들의 삶을 특징지을 거라 기대했었다. 전체 신약성서가 가르치는 것처럼 팔복이 요약하고 있는 영성은 결코 비현실적인 이상으로써 의도되지 않았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전적으로 영적인 문제가 아니다.

    팔복의 내용은 참으로 예언적이다. 때문에 팔복이 말하는 영성과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해와 실천의 수준 사이에는 항상 긴장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가치가 인간의 성향에는 충돌을 일으킨다는 것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복음서에는 자비와 용서에 관한 이해, 비폭력, 성적 순결 그리고 영적 빈곤에 대한 충격적인 사건이 나오는 데, 이런 가치는 하나님나라를 특징지으며, 성령의 권한 이양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놀랄 이유가 없다.

    팔복은 하나님의 법 아래에 있는 삶의 행복에 대해서 요약한다. 팔복은 메시아 공동체의 영성을 위한 기초로써 홀로된 개인으로 살아가는 영웅적인 노력이 아닌, 하나님 통치 안에 있는 공동체와 함께 공유하는 삶을 요구한다. 팔복의 영성은 “좋은 소식”이며, 좋은 소식인 복음이란 단어의 근원적인 의미는 사회, 정치, 경제의 전체 분야에서 잘됨을 나타낸다.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의 목록은 단지 개인적인 선호에 따라 골라지거나 배제된 선택항목으로써 예수 제자들에게 주어진 고정된 영적 덕목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팔복의 목록은 전반적으로 진실한 메시아 공동체를 묘사하며, 하나님 통치 아래의 삶을 특징짓는 충만하게 통합된 영성을 나타낸다.

    1.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영적 가난의 자세는 모든 기독교 영성의 근본이다. 영적 가난은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 안에서 자녀가 되기 위한 영적 조건을 거침없이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루어 진다. 이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의존하고, 하나님의 섭리와 보호를 신뢰하는 태도와 실천을 의미하며,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 안에서 누리는 친밀한 관계를 뜻한다. 예수는 그가 하나님을 아바(아빠)로 부르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가르침으로써 이것을 분명하게 증명했다.

    그러나 복음서는 이 가난에 대해서 관념적이거나 영적인 이해로 말하지 않는다. 새로운 메시야 공동체 안에서 삶을 함께 나누고 하나님의 섭리를 급진적으로 의존하는 삶을 사는 것은, 맹신적이며 물질주의적인 태도와 관습의 뿌리를 잘라내는 것이다. 세상의 반대 방향에서 보면 “자발적 가난”이란 예수와의 연대 즉, 자유로우면서도 구체적으로 세상 안에서 그의 소명을 감당한 가난의 정신과 실천과의 연대를 의미한다.

    A bowl, glass and cup in green, red, and blue by Manansala.

    Vicente Manansala, 정물화

    2.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세상 가운데서 하나님 통치의 가치를 살아낸다는 것은 인간의 고통과의 연대를 책임지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 함께 연민(문자적으로 함께 고통을 받는 것)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을 포함한다. 이런 순결하고 대리적인 고통은 진정한 기독교 영성의 중심이 된다.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은 다른 이들을 위해 받는 순결한 고통을 구원의 선행으로 말한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가장 충만하게 표현된 진실을 만나게 된다. 예수와 함께 한 우리의 정체성과 이 세상의 여러가지 악한 결과로 인해서 고통을 받는 사람들과의 연대는 십자가를 지는 것-악한 사람들을 위해서도-으로 우리를 부른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우리에게 약속한 것, 즉 다른 이들의 유익을 위해 받는 우리의 순결한 고통은 창조물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잃어버림 바 되지 않을 것을 온전히 신뢰하면서 말이다.

    3.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세 번째 복인 온유의 복은 첫 번째 복인 가난의 영성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온유는 죄의 요청에 따르지 않으면서 죄의 압박을 확고부동하게 저항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의미하며, 악인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서 악에 대항하여 끈질기게 저항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런 유형의 온유는 하나님 안에 있는 우리의 소망과 신뢰에 견고히 뿌리를 내리고 있다. 온유한 자는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음을 진실로 믿는 사람이다. 온유는 어떤 폭력이나 보복의 형식으로 원수를 갚으려는 유혹을 거부하는 것이다. 정의를 위해서 모든 폭력을 포기하는 것이며, “깨끗한 손”과 “정결한 마음”으로 악에 대해 투쟁하는 것이다. 비효율적인 전략이 아니라, 사실 이것은 나사렛 예수에 의해 독특하고 강력하게 성육신화된 십자가의 전략이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성서적 정의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구원 행동에 온전히 의존된 공동체 상황 안에 있는 인간과의 건강한 관계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삶을 함께 하기 위함이며, 바로 그 생존을 위함이다. 성서적 정의는 또한 전방위적인 대인관계를 포함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인간 공동체의 평범한 삶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신실함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정의는 하나님의 의로운(또는 정의로운) 통치 상황에서만 보여진다.

    성서적 정의는 응보적 정의와는 다르게, 자격이 있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필요가 있는 사람에게 상이나 심판을 주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과부, 고아, 이방인, 가난하고 압제당한 자들을 위한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 성서를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인간을 위해 의로운 관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표현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모든 것과 의로운 관계를 맺는-는 배부를 것이다 라는 것은 구원의 공동체 안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

    5. “긍휼한 자는 복이 있나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장 닮았다는 것을 긍휼을 통해 보여 주는 것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는 긍휼의 영성에 대한 분명하고 구체적인 예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우리가 긍휼한 만큼 우리도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수 있다.

    복음서가 말하는 긍휼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시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마음을 다해 용서하는 것을 의미한다(마 18:35). 두 번째로 긍휼하다는 것은 어렵고 궁핍한 사람들을 사심없이 돕는 것을 뜻한다. 자비로운 행동을 계속해서 하는 사람은 긍휼을 받아야 할 “이웃”의 처지에서 긍휼에 대한 경계선을 긋지 않는다. 예수는 우리에게 긍휼의 본성을 가르쳤으며, 이에 따른 진정한 기독교 영성은 기꺼이 우리의 적을 용서하고, 궁핍한 자와 넉넉하게 나누는 자발성에 의해 특징지어진다.

    6.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모든 진정한 기독교 영성을 위한 “마음의 청결함”은 시편 24:3-5의 빛 안에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그는 여호와께 복을 받고 구원의 하나님께 의를 얻으리니”

    마음의 청결함은 진실한 행동과 신실한 관계 안에서 표현된다. 성서적 영성은 우리의 내적 태도(마음의 청결함)와 외적 실천(깨끗한 손)의 밀접한 관계로 특징지어진다. 하나님을 알고 경험한다는 것은 그분의 도움 안에서 충성된 마음으로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와 동행하는 것이다.

    7. “화평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평화를 위해 일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이며, 특별히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하나님 아버지처럼 행동하는 탁월한 중재자이다. 성서의 하나님은 깨어진 창조세계의 모든 영역 안에서 전체의 회복을 위해 즉, 샬롬(평화)을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으신다. 예수는 평화의 회복을 위해 온전히 헌신했다. 예수는 그의 생애와 죽음을 통틀어 원수와의 화해를 주목했다. 샬롬의 회복을 향한 행동은 모든 진정한 기독교 영성을 특징질 것이다.

    8. “의를 위하여 핍박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팔복은 하나님의 사람의 순결한 고통으로 결론을 내린다. 팔복의 영성은 그 시대뿐만 아니라, 지금도 반체제적이다. 정의롭고 평화로운 하나님의 통치에 신실했던 예언자들은 핍박을 받았으며, 그것은 예수의 운명을 나타냈다. 또한 이것은 계속해서 메시아의 부르심에 신실하게 반응하는 공동체의 특징이 된다. 성서적으로 말하면, 증인과 순교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그리스어로 marturia는 증인을 의미한다).

    A cubist expression of community, depicting houses and a red sun.

    Vicente Manansala, ‘공동체’

    다른 어떤 기독교 역사의 기간보다 우리 시대에 더 많은 순교자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때, 우리는 팔복에 대한 현시대의 타당성을 인정하게 되며, 진정한 영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실천을 위해 팔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된다. 이는 단지 소수의 교회만이 아닌, 모든 교회를 위한 것이다. 죽음의 권세-하나님과 정의, 평화, 구원 그리고 우리 세상의 생명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대항하기 위해서 배치된-는 하나님의 사람의 영성이 본질적으로 반체제적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팔복의 영성은 실현불가능한 이상이 아니라, 오히려 나사렛 예수의 정신, 말, 행동에 대한 현실적이고 가시적인 반영이다. 팔복은 1세기 메시아 공동체의 삶을 특징짓는 핵심 가치를 나타낸다.

    예수를 따르는 것은 제자의 삶 안에서 내면화된 감각이나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한 영적인 사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제자도는 팔복에서 설명된 태도나 행동을 통해 표현된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현실이다.


    성령과 함께 하는 삶》(대장간)에서 인용했습니다.

    Against a backdrop of shacks and telephone wires, Manansala depicts a poor mother and child. Vicente Manansala, ‘빈민가의 마돈나’

    주註

    1. Walter Klaassen, Anabaptism in Outline (Walden NY: Plough Publishing), 87.
    2. Galilea, El camino de la espiritualidad, 59.
    지은이 JohnDriver 존 드라이버

    드라이버는 몬테비데오에 있는 메노나이트 복음주의 신학교에서 교회사와 신약학 교수로 봉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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