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painting of a field of poppies

고통에서 섬김으로

손녀딸에게 보내는 편지

피다 마이어

August 14,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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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낸시에게,

할머니는 불쑥 우리 낸시에게 편지를 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지난번 네게 보낸 편지는 우리 낸시가 지식과 정신과 마음을 넓힐 공부를 우루과이 몬테비데오에서 시작하며 미지의 세계에 발을 디딜 때였구나. 좋아하는 공부를 하며 다른 언어도 숙달하고, 조국을 넘어 타국과 그 나라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려고 애쓸 때였어요.

그리고 학업을 더하려 콜롬비아 보고타로 전학을 가서 이제 1년만 더하면 문학 및 그래픽 디자인 학사학위를 받을 수 있었는데, 전 세계를 휩쓴 팬데믹으로 중단이 되고 말았네. 네가 콜롬비아 국경이 닫히기 직전 마지막 비행기에 올라타며 나한테 건 전화를 통해 너네 대학이 하루 전날 봉쇄되었다는 소식을 알게 됐어. 갑작스런 이별이라니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겠구나. 가난과 아름다움, 폭력으로 증폭된 정치 투쟁, 그 이면의 인간적 면모를 이해하며 콜롬비아에 대한 네 사랑은 극진해졌지. 대학 밖에서 노숙하는 베네수엘라 가족과 네가 참 친해졌건만 코로나 정국에 어찌 그들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싶다. 할머니 마음도 참 아프구나.

보고타에 사는 친구들을 위해 기도를 하며 모은 네 손길과 볼리비아 라파즈에 사는 브랄울리오와 마리아 콘도리를 위한 나의 기도 손이 한데 합쳐지고 있어. 콘도리 부부는 자신의 안전한 집을 떠나 가게에서 매일 세 시간씩 보내고 있다고 하는구나. 돈 좀 벌어보겠다고 그러는 게 아니야. 평상시에도 필요한 만큼도 못 벌었었거든. 공포와 근심에 싸인 피해자들의 호소를 듣기 위해서란다. 거리에 총을 든 군인들은 봉쇄를 보장할 거라고는 하지만 원주민들은 알고 있단다. 바이러스가 퍼지면 정부는 손을 놓을 거라는 걸 말야.

그런데 미국 정부는 뭘 하고 있는 거지? 아니 이렇게 강하고 성공적인 정부가 고통과 죽음의 맹공에 맞설 준비가 안 되었다고? 현대의 기억 속에 무자비한 팬데믹 재앙이 흔적을 안 남긴 것도 아닌데. 불과 1세기 전인 1차 세계대전 후에 발생한 스페인 독감의 여파로 유럽은 광적인 민족주의와 파시즘이 일어났어. 우리 미국엔 선과 악 중 어떤 세력이 판을 치게 될까?

우리나라는 무엇으로 팬데믹을 대응할까? 바이러스는 우리나라(!)가 아니라 중국에 먼저 퍼졌지. 그리고 한국과 일본으로. 여전히 우린 아니라고 안심하고 있었어 다음은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영국. 이제는 우리나라라고 하는데, 코로나의 위협에 면역이 돼서 우리 정부는 바이러스의 존재를 부정하는 거였을까? 우리는 공동의 인류애를 상실해 버린 걸까?

미국의 경제력은 월스트리트와 몇몇의 억만장자들 그리고 스포츠 영웅들과 연예 산업에 의해 좌지우지되고, 우리의 가치는 가장 약한 자들을 위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갖고 있느냐에 달려있지. 지금 모든 것들이 해체되는 상황이니 우리도 빈부의 격차를 제대로 보게 되지 않을까 싶구나. 이 끔찍한 바이러스는 요양원에서 비극적으로 드러나듯이 노약자들과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더 가혹하게 다루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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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싱어 사전트의 ‘양귀비’

프란치스코 교황은 텅 빈 베드로 성당 광장에서 특별한 “Urbi et Orbi(이 도시와 온 세상에)” 강복을 전했다. “우리는 전 세계적 전쟁이나 불의 앞에서 정신을 차리지 않았으며, 가난한 사람이나 중병이 든 지구의 외침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 병든 세상에서 언제나 건강하게 지낼 것이라고 생각하며 무정하게 달렸습니다.” 이제 말씀에 귀 기울 때가 오고 말았어.

우리는 ‘왜’라는 위대함 앞에 서 있다. 왜 우리에게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어떻게 하나님은 죽음이 우리를 압도하도록 허락하시는 거지? 그건 단순히 생명을 구할 수 있는 의료 장비 확보 문제가 아니야. 비록 우리처럼 번영한 나라가 이런 문제에 봉착했다는 게 정말 괴롭지만, 고통과 죽음을 대단위로 함께 경험한 깊은 마음에서 나온 질문이란다.

예수회 소속 월터 취제크 신부는 2차 세계대전 중 소비에트 강제노동수용소에서 견딜 수 없는 어려움을 겪었어. 그의 책 «나를 이끄시는 분»(바오로딸)에서 왜라는 질문은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인간이 겪고 있는 고뇌 너머에 무력함을 보는 것이라 했지.

우리 하나님은 분노의 신이 아니시란다. 부활절은 늘 그랬듯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심은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심지어는 신에게 버림받았다는 감정이 들 때라도-을 겪게 하시므로 우리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함께하신다는 걸 상기시키지. 여전히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이 불쌍한 이 땅에 휩쓸 때에 우리와 함께 우신단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성 마태 수난곡’을 들어보렴. 그 곡을 들으며 난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 속에 다시 사로잡혔어. 예전에 합창을 할 때는 바흐가 교회 회중들이 따라 부르도록 만든 곡들일 거라 상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이 곡은 “mea culpa(내 탓이로소이다)”에 대한 응답이야. 네 탓이 아니라 내 탓입니다라는. 모든 잘못을 네 탓으로 돌리기보다는 책임을 지며 우리를 정결케 하는 시간이다.

서로 겪고 있는 고통을 통해 우리 맘에 긍휼함이 깨어나길 바라게 된다. 앞으로의 일을 걱정하는 게 일반적인 경험이 된 지금, 우리 발밑에 안전장치가 제거되고 나니 공동의 인류애에 눈을 뜨게 된다. 너(같은 젊은이)는 미래의 희망과 꿈이, 나(같은 늙은이)는 인생의 끝이 불확실해 버렸어. 나이를 먹으면 사물을 달리 보게 되지. 이 사악한 바이러스가 아직 꿈과 목적을 이루지 못한 젊은이 대신 할미의 풍성했던 팔십 인생을 끝낸다면 난 신께 감사하련다.

이런 생각은 나의 할머니를 통해 배운 거야. 내가 10살 때, 아홉 자녀를 둔 어떤 엄마가 천식 합병증으로 죽은 일이 있었어. 우리가 살던 파라과이 정글에서 그 엄마를 구할 수 있는 호흡장치나 약 따위는 없었으니까. 할머니는 ‘내가 대신 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죽을텐데’ 하시며 우셨단다. 할머니는 4년 후에 독감으로 돌아가셨지. 이웃을 극진하게 사랑하고 섬기다 돌아가셨다는 걸 알면서도 난 정말 할머니가 그리웠어. 지금 수많은 동료 시민들의 겪고 있는 슬픔을 보자니 그때 생각이 나는구나. 중환자실에서 혼자 죽은 분들과 슬퍼하는 이 하나 없는 망자들을 위해 애도하련다.

파라과이에 머문 20년 동안 어떤 팬데믹도 우리를 해치진 못했지만 너무 많은 죽음이 닥쳐왔어. 어리고 연약한 사람뿐 아니라 아빠나 엄마들도 앗아갔지. 우리 가족은 히틀러 치하에서 영국으로 쫓겨가 2차 세계대전 중 독일 잠수함으로 우글거리던 대서양을 건너 피난을 가야 했어. 영국의 이웃들은 외국인, 특히 독일인에 대한 공포심으로 우리를 적대했지. 일본계 미국인들처럼 미국에서 억류당했던 것처럼 독일 국적인들도 같은 일을 겪었단다. 그런 우리에게 파라과이는 피난처를 제공했어.

나는 2살 반이었고, 막내동생 지오바니는7개월 된 아주 귀여운 아기였는데, 파라과이에 도착한 첫 주에 이질에 걸려 죽고 말았어. 탈수증을 도와줄 정맥주사도 없었으니 죽음을 막을 길은 없었단다. 우리 엄마는 아기를 담은 작은 관을 따라 걸어서 정글의 황량한 가장자리에 아기를 묻었어. (거기에는 이미 작은 무덤 하나가 있었어.) 새 집에 들어설 틈도 없었단다. 집이라곤 해도 다른 피난민 가족들과 홑이불이나 침대 시트로 칸막이를 친 지붕만 덩그러니 있는 곳이었지. 몇 걸음만 나가면 정글이었어. 이곳에서 애도의 시간을 갖기란 불가능했지. “이웃에게 절망을 들키지 않고 울 길이 없었어.” 엄마가 내게 한 말이야. “베개로 머리를 누르며 흐느꼈지. 그게 유일한 탈출구였어.”

이런 이야기도 엄마가 죽기 몇 년 전에야 할 수 있었으니 처절한 아픔도 시간이 지나면 자비로이 희미해지는 걸까. 엄마의 슬픔은 시간이 지날수록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 정제되었단다. 이 슬픔은 엄마를 다른 사람들에게 연민 가득한 다정한 어머니로, 할머니로 만들었어. 우리 엄마는 이웃 엄마가 아프다 싶으면 자신의 애들도 있는데 그 집 아기들을 데려다가 보살폈어.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후에도 엄마는 특별히 돌봄이 필요한 아기에게 사랑을 퍼부으셨지. 죽어가는 동생에게 불렀던 자장가를 이웃 아기들에게 불러주며 당신의 슬픔을 사랑과 연민으로 승화시키셨어.

낸시야, 지금은 도전의 시기야. 개인의 상실과 두려움을 사랑과 섬김의 힘으로 이겨내길 바란다. 이건 다른 사람들을 딛고 이룬 개인 성공의 자본주의와는 달라. ‘크리스마스 캐롤’에 나오는 말리의 유령이 한 적나라한 말을 들어보렴. “내 사업은 인류를 위한 것이야 했어. 자선, 자비, 관용, 선행 모두가 내가 할 일이었다고. 내가 한 일이라곤 망라한 대양에 한 방울도 안 되는 거였어.” 스크루지가 변했듯이 우리 개인과 국가도 이런 변화를 겪어야 될 거다.

우리 나이든 세대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단다. 우리 5명의 늙은이들은 돌고래처럼 서로 의지하며 지역 병원과 요양원에 보낼 마스크를 만들고 항상 기도를 하고 있단다. 오늘 아침에 수많은 사망자 뉴스를 들으며 우린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어. 그런데 그렇게 폭우가 쏟아지는 같더니 어느새 다시는 인류를 멸종하지 않으리라는 징조인 무지개가 펼쳐지는 거야. 게다가 우리 가족에 남자 아기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어. 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셨으며 한 귀한 영혼을 우리에게 맡기셨다는 징조였어!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할머니는 너희 젊은이들이 나이든 사람들을 돌보려 애쓰는 모습이 가슴 뭉클하단다. 공공을 위해 의사와 간호사들과 최전선에서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들이 용기와 기력이 쇠할 때 우리 기도가 그들에게 힘이 되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

희생과 용기 있는 행동이 이미 알려진 사람들도 있지만 조용히 섬기는 분들도 있을 거야. 난 젊은 세대들이 개인적 실망감을 도전 삼아 자비롭게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에 헌신하는 것에서 희망을 본단다.

하나님의 뜻으로 우리가 이 지옥을 살아낸다면 너와 우리 모두에게 전보다 더 위대한 미래가 있을 테니 용기를 내자. 우리는 너희들의 꿈이 필요할 거야. 할머니는 역경을 경험한 너희 세대가 이 전염병의 잿더미에서 다시 한 번 생명과 사랑의 불사조로 우뚝 일어날 거라 믿는단다.

사랑을 듬뿍 담아

네가 사랑하는 피다 할머니로부터


피다 마이어 할머니는 평생 교사이며 열렬 독자로 뉴욕의 월든 팍스 힐 브루더호프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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