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ds holding a babys feet

완벽하게 지어진

딸이 가르쳐준 아름다움과 가치 그리고 존재의 선물

사라 윌리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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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의 명랑했던 목소리가 가파르게 가라앉았다.  그는 검사실을 나가더니 여 기사와 함께 돌아왔다. 나는 그가 단순히 초음파 검사에 미숙해서 여 기사의 도움을 받아 처음부터 다시 하는구나 싶어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 여자는 내 팔에 손을 얹고 모든 임산부들이 절대 듣고 싶지 않은 말을 꺼냈다. “참 미안한 말씀을 드리게 됐습니다. 태아에게 이상이 발견돼서 전문의를 모셔와야 될 것 같습니다."

"네? 그럴 리가 없어요!" 나는 바로 대답했다. “아기 얼굴을 봤는데요. 정, 정상으로 보였는데.” 그녀는 고개를 가로지르며 내 팔을 쥐었다. 온몸이 마구 떨려왔다.

산부인과 전문의가 내 옆에 앉았다. 그는 컴퓨터 커서와 손가락으로 내 안에 있는 아주 작은 사람의 이곳 저곳을 가리키며 이해할 수 없는 숫자들을 중얼거렸다. "윌리엄 부인, 이 아기는 살지 못할 겁니다. 치사성 이형성증을 앓고 있어요. 출생 직후에 죽음을 확실히 초래할 치명적인 뼈의 기형이 보입니다. 흉부는 너무 작아서 폐가 제대로 자라지 않고 있어요.” 그리고는 잠시 멈추더니 이렇게 말했다. "내일 아침에 남편 분과 함께 오시면 어떻게 하고 싶으신 지 더 얘기를 나누겠습니다.” 몇 분 후 나는 옆 방에 다른 전문의와 마주앉았다. 그제서야 나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지"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앉아 의사가 ‘끝을 맺을’ 날짜를 제안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a babys foot

"그렇게 하는 게 가장 좋을 꺼야, 그렇지요?" 나는 그날 밤 우리 두 딸을 재운 후에 폴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전의 나라면 낙태라니, 바로 반대했을 것이다. 그러나 충격적이게도 지금 내가 유일하게 원하는 것은 가능한 빨리 태아를 내 몸에서 빼내는 것이었다. 우리는 엄격한 윤리적 원칙만으로 희망을 잃은 채 임신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우리 아기가 고통스럽게 죽는 것을 지켜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폴은 기도를 해 보자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직접 우리 가슴에 대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생생한 목소리를 들었다. ‘여기 아파서 죽어가는 아이가 있단다. 나를 위해 이 아이를 사랑해 주겠니?’ 이 물음으로 모든 것이 뒤바뀌었다. 더 이상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추상적인 윤리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온화한 사랑의 요청이었다. 기도를 마치기도 전에 원칙과 선택 사이의 괴리가 해소되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운 나는 어떤 결정을 내릴 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결정이 어떤 사람들을 분노하도록 자극할 줄은 알지 못했다. 의대의 한 교수는 낙태를 찬성하는 도덕적인 논리를 이렇게 토로했다. “태아의 기형이 판명됐는데도 낙태하지 않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아요. 피할 수 있는 고통을 고의적으로 세상에 가져오는 게 아니고 뭡니까? 최적의 삶이 보장되지 않는 상황에서 낙태는 윤리적 의무입니다!"

나는 형편없는 에세이를 쓴 학부생처럼 논거가 빈약하다는 이유로 질책을 받는 것 같았다. 그의 말이 일부러 무례하게 나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은 옥스포드 대학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의 논리와 거리를 두고 그의 주장을 무시하려 했지만,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알지 못했다. 그리고 내 동료의 주장은 아이의 생명을 연장하기로 한 나의 결정이 이기적인 건 아닌지 생각하도록 했다. 그 후 며칠 동안 ‘최적이 아닌’ 이라는 말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우리는 엄격한 윤리적 원칙만으로 희망을 잃은 채 임신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침묵 하며 반론을 준비했다. 내가 고려해왔던 모든 관행과 의대 동료 교수의 주장은 특정한 규범과 건강, 삶의 질에 대한 판단 아래 가정된 것이었다. 그러나 만약 이 논쟁의 근거가 되는 판단 자체가 의심스럽다면 어떻게 될까? 누가 정상과 비정상을 판단하는가? 그리고 삶의 질은 어떤 기준으로 평가되는가? 정상적인 사람이란 무엇인가? 정상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특정한 지능이나 피부색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정상이라는 것도 모든 문화에서 받아들여지는 기준이 아닌 상대적인 척도이다. 이 상대적인 잣대의 한쪽 끝에는 지적 능력, 질병, 나이 또는 사고가 제한적인 사람들이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잣대의 반대편 끝에는 효율적 정신과 몸을 가진 사람들을 배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나의 세 아이들은 정상 스펙트럼의 서로 다른 지점에 처한다. 그들을 똑같이 사랑하는 부모로서 어떤 아이가 이 지구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가치 있는지 결정할 수 있을까?

만약 여러분 스스로 선택할 수 없거나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없다면,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질병이나 장애로 뜻하지 않게 모든 행동 능력을 빼앗긴다면 어떻게 될까? 이것이 당신을 인간 이하로,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만든단 말인가? 어떤 것을 성취하기 전에 우리는 덜 된 인간인가? 그리고 만약 당신이 재능 없이 태어났고 자궁에서 제대로 된 몸이 형성되지 못했다면, 당신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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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셋째 딸의 이름을 세리안(Cerian)이라고 지었다. 웨일즈 말로 ‘사랑하는 이’라는 뜻이다. 세리안의 삶은 태어나기도 전에 끝이 났다. 그 순간 하나님의 실재가 병실 안으로 놀랍게 임했다. 그것은 내가 전에도 후에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 방은 묵직하고 친근하며 동시에 거룩한 하나님의 실재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안에  모든 것이 잠잠해졌다. 나는 거의 숨도 쉴 수 없었다. 그의 존재는 긴급하고 즉각적이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한없는 사랑 가운데 오셨고, 당신과 함께하시기 위해 이 작고 기형적인 아기를 당신의 집으로 데려 가신다는 것을 확실히 알았다. 세리안은 더이상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을 받는 일은 없을 것이며, 오직 하나님의 평화로운 경이로움 안에 감싸여 있을 터였다.

세리안의 삶은 태어나기 한 시간 전에 끝이 났다.

처음 세리안의 기형을 알면서도 낳기로 했을 때, 이제 나의 계획과 희망은 완전히 끝장난 거라고 생각했다. 이건 내가 결코 원하던 바가 아니었다. 나는 구석으로 내몰려졌다. 하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큰 사랑을 보여주신 곳도 이 극한의 장소였다. 이 때까지 내 욕망과 소망의 소용돌이는 내 필요와 결점, 자질에 초점을 맞춘 채 나를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내 삶은, 심지어 신앙생활에서조차도 성취와 평판, 다른 사람들로부터 받는 존경과 인정을 축으로 돌아갔다. 원하는 모든 것과 완벽한 집, 완벽한 아이들, 완벽한 직업을 이루느라 바쁘기 짝이 없었다. 깊고 소중한 것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리고 부족해지면 부족할수록 그것을 채우려고 애썼다. 그러나 세리안을 잉태했던 9개월 동안 하나님은 뜻하지 않게 너무나 야성스럽고 아름답고 선하고 은혜롭게 다시 내게 가까이 오셨다. 나는 세리안을 품고 다니며 그분의 존재를 만졌고, 다른 모든 욕구들 안에 묻혀있던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에 대한 나의 절절한 열망을 깨달았다. 세리안은 내 능력을 부끄럽게 했고, 그 아이는 자신의 연약함과 약점으로 내게 친밀하게 다가왔다. 나를 그토록 오랫동안 지탱했던 가치체계가 세리안의 아름답고 완성된 인격을 통해 무너지고 말았다.

세리안이 죽은 지 3년 후, 나는 서구와 비서구 여성에 대한 태아 검사 정책의 영향을 논의하는 국제 의학 회의에 초대되었다. 나는 세 시간 동안 질문 공세를 받았다. 태아 검사에 대한 내 견해는 이 그룹에게 부수적인 것이 분명했다. 그들의 관심은 임신 종료 여부를 갑자기 결정해야 하는 상황에 놓여 있던 엄마로서의 내 경험에 집중되어 있었다. 내 이야기는 일부 부모들이 태아 검사실에서 태아의 운명을 갑자기 결정해야 하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어떤 경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냉엄한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런 상황에 처한 기분은 어땠는가?" 모든 질문들이 결국 이 문제로 모아졌다. 이 ‘선택의 필요성’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데 익숙한 서구 여성들에게도 어려운 일이라면, 중동, 아프리카, 남미 지역의 여성들에게는 훨씬 더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 서구에서는 태아의 성 판별이 부모가 세상에 곧 환영할 아기의 이름을 미리 짓고, 성별에 따라 아기 방을 꾸미는 것을 의미한다면, 비서구 세계에서는 태아의 성 판별로 여아임이 들어날 경우, 엄마들은 낙태를 하도록 견딜 수 없는 강요를 당할 위험에 처하게 됨을 뜻한다.

회의장에 둘러앉은 모든 사람들의 주된 관심사는 이 부당한 위치에 놓인 여성들을 어떻게 최선으로 지원할 것인지를 이해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런 태아 산전 검사로 인해 부모들, 특히 여성들이 무언가를 결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며 감당할 만한 것인지, 그 누구도 묻지 않았다. 태아의 이상을 발견하고 진단하기 위해 태아 검사 프로그램을 시행하는 것이 정말 현명한 것인지,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세계의 다른 지역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양에서 당연하게 일어나는 산전 초음파 검사의 평범하고 일상적인 풍습이 갑자기 낯설게 느껴졌다. 이 관행은 인간성을 지각하고, 자율성과 선택을 정의하고, 여성 행위자의 의사 결정을 상상하고, 지역 공동체에 대한 이해와 경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해 마련된 특정한 방법이다. 이러한 관행은 선택에 대한 특정한 생각과, 무엇보다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인간성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정의에 의존한다. 임신 중 초음파 검사는 권고 사항이며 자발적인 필요보다는 관습적인 것이지만, 그럼에도 임신한 부부들 대부분은 이를 선택할 것이라 예상된다. 그 관습 자체를 도덕적으로 중립적이라 여기며 그것이 좋은지 나쁜지, 옳은지 그른지를 결정하는 것은 개인적인 선택이므로 얼마나 적극적으로 행하는지는 정도의 차이라고 말한다.

내 옆에서 진행되는 토론을 들으며 나는 세리안의 작고 못난 몸매를 세세히 떠올렸다. 기술적으로 말하자면 임신 기간 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은 세리안의 신체적 이상과 생물학적 성별이라는 두 가지 과학적 사실이었다. 부모가 자녀에 대해 가장 먼저 안 것이 이 두 가지 특정한 사실이라니, 여기에 어떤 이로움이 있을까? 이런 선행 지식이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뭐란 말인가?

종종 부부들은 임신16주나 20주에 이루어지는 태아의 초음파 검사를 통해 임신의 ‘성공 가능성’을 확인한다. 그때까지 그들은 태아에 대한 감정적 헌신을 보류한다. 나는 많은 부부들이 "아직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 검사가 끝날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들은 적어도 사회적 관점에서 초음파 검사가 임신이 진짜인지 아닌지 결정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들은 그 초음파 검사가 아이에게 자신들의 사랑을 낭비하지 않도록 보호라도 받을 수 있는 신호인 것처럼 말한다. 이런 식으로 초음파 검사는 인간에 대한 특정한 사고방식을 가르치고 강화시킨다. 그것은 임신한 부부에게  "이 아이는 신체적으로 정상적인가?"라고 물어보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이 질문이 마치 가장 중요하기나 한 것처럼. 검사 결과가 태아의 이상을 나타내든 아니든, 주어진 정보에 따라 부모가 어떻게 결정하고 행동할 것인가와 상관없이, 이 관행은 모든 사람들에게 임신 초기 단계에 이 질문을 하도록 한다. 태아의 이상 때문에 큰 슬픔과 고통 속에 임신을 끝내기로 한 부모들은 극히 소수일 것이다. (이런 부모들을 절대로 손가락질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신체 능력이 최적이 아닌 아이의 삶은 끝내도 된다는 생각이 보편화된 사회적 관행에 영향을 받고 있지 않은가? 이 생각은 너무나 그럴 듯해서 임신 전체기간까지 낙태를 법적으로 허용 가능토록 했다. 게다가 우리는 도덕적 중립성이라는 허울을 쓰고 그 생각을 감추기 위해 정교한 언어를 쓰며, 왜 그러한 생각이 옳고 필요한지 설명을 늘어 놓으며 ‘삶의 질’을 정의하였다.

세리안은 내 능력을 부끄럽게 했고, 그 아이의 연약함과 약점으로 내게 친밀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우리는 이 생각이 정말 정당한지 물어본 적이 있나?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들 자신들에게는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방식을, 소수의 사람들이 당할 때는 눈 감아 버리는 사회적 관행을 묵인하는 것이 정녕 옳단 말인가? 정말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동등한 존엄성과 존경으로 대우받기 보다는 그들이 정상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지, 혹은 그들이 여성인지 질문 받기를 원한다고 보는가? 이런 태도는 태어나지 않은 ‘사람들’의 인간성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어떤 식으로든 신체가 ‘정상’인지에 따라 인간의 인격을 규정하는 것은 인간으로서 타고난 본질적인 가치를 빼앗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나는 세리안과 지낸 나날들을 깊이 되돌아봤다. 그 와중에 있을 때는 참 길게 느껴졌는데 막상 일이 돌아갔던 상황은 너무 짧았다. 나는 세리안과 함께했던 시간의 아름다움과 특권을 너무나도 쉽게 놓쳤다. 이 제한되고 연약했던 시간 또한 나의 인간성을 뿌리 깊게 했다. 얼마나 내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 필요한지, 그리고 그들도 나를 필요로 하는지 깨닫게 해 준 시간이었다. 9개월 동안 모든 인간은 한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는 유일한 기회를 얻는다. 많은 젊은이들이 남자 또는 여자로 태어났기에 그리고 자신들의 신체 능력과 성 정체성, 건강과 외모 문제로 격렬하게 씨름한다. 그렇다면 9개월 동안의 임신 기간이야말로 부모로서 아이를 있는 그대로, 건강하거나 아프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잘 생겼거나 못 생긴 것과 무관하게 받아 들일 수 있는 유일한 또는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왜 우리는 이 특별하고 독특한 선물을 도둑질 당하도록 내버려 두는 걸까?

우리 모두는 아이들이 귀하다고 하면서 실상은 우리 자신 확장의 일환으로 얻은 상품처럼 여긴다. 우리는 우리가 선택한 사람들에게 선별적으로 인격을 부여하는 것에 익숙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별한 이들이 호감이 가고, 좋고,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실제로 서구 사회에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걸 의미한다.

세리안에게 어떤 선택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완벽하게 지어진 존재였다.

우리 사회는 우리가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의 선택은 인간이 번영할 수 있는 수단이며 자신의 선택이 손상되는 것은 인간성이 말살 당하는 것이라 한다. 하나의 사회로서 우리는 고통을 통제하고 지배하며 없애려고 애쓴다. 이런 노력이 실패하면 우리는 고통을 숨기고 언급을 삼가하며, 자기 보호장치를 마련하고 스스로를 괴로움과 분리하려고 애써 무시한다. 이렇게 우리는 죽음이라는 현실에 가면을 씌운다.

선택 능력에 의해 규정되는 인간됨이라는 생각에 우리가 푹 빠져있다 해도 그건 엉망이고 복잡한 우리일상의 인간성과 일치하지 않는다.  뼈 속 깊숙이 노화가 스며들고, 피부에 주름이 생기고, 시력이 떨어지고, 근력이 떨어질 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존하게 되거나, 다른 사람을 돌보게 되는 상황이 품위를 잃는 순간이라고 믿는 사고방식이다.  우리에게는 지금 이 순간뿐이고 지금의 경험만이 전부라는 식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선택이 실패하거나, 선택의 범위가 좁아지고, 우리의 선택이 다른 사람들에 의해 간과되거나 침해되는 상황이 오면(누구에게나 이런 때는 온다) 모두 속수무책이 되고 만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세상의 모순에 갇혀 버리는 꼴이다.

이런 배경에서 세리안의 고요하고 아름다웠던 인생은 계속해서 이렇게 도전한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정말 무엇을 의미할까?’ 세리안은 어떤 선택도 하지 못했으나 완벽하게 인간이었다.

내가 세리안과 함께 지낸 시간 중에 내가 평생 간직할 가장 소중한 기억은 아이가 죽었을 때 얼핏 보였던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이었다. 그것으로 기억 속에 남아있던 좋고 나빴던 잔상들이 모두 희미해졌다. 하나님은 약한 인간을 당신의 집으로 데려가 함께 사시겠다며 사랑으로 오시었다. 이 만남은 내 인생을 확 바꾸어 놓았다. 단순히 말하면 그것은 나에게 세상에 다른 방식의 삶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제한과 한계, 고통과 약함, 장애와 약점은 선물이 될 수 있다.인간성을 빼앗기 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되려면 꼭 필요한 것들이다. 이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의 신체적 정신적 상태와 관계없이 서로에게 존엄성을 세워 줄 기회를 박탈하고, 인생에 이미 부여된 본질을 놓치게 된다. 궁극적으로 사람됨은 자기 규정과 자기 창조의 작품이 아니다. 오히려 선물이다!

지은이 Sarah Williams 사라 윌리암스

사라 C. 윌리암스는 옥스포드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영국과 유럽의 정치, 문화사를 가르쳤다. 옥스포드에서 17년을 가르친 후, 2005년 가족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로 이주했고 리젠트 대학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현재 사라는 남편 폴과 함께 옥스포드 근처에 있는 코츠월드에 살면서 연구와 글쓰기, 강의를 지속하고 있다. 정체성과 인격에 관한 현대 논쟁을 반영한 영적 자서전인 ‘완벽하게 지어진’(한국어 미발간)의 저자는 영국의 유명한 작가 제니퍼 리스 라콤비의 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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