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마음을 잡아 끈다. “사랑해주세요. 도와주세요. 보호해주세요.” 우리 어른은 아이들의 보호자요 후원자를 자처하지만, 정작 아이들이 필요한 건 우리 자신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 절실한 쪽은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어른이다.

갓 태어난 아기의 울음소리가 마음을 잡아 끈다. “사랑해주세요. 도와주세요. 보호해주세요.” 우리 어른은 아이들의 보호자요 후원자를 자처하지만, 정작 아이들이 필요한 건 우리 자신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더 절실한 쪽은 아이들이 아니라 우리 어른이다.

과잉 인구가 지구를 파괴한다는 전문가의 말에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이 지구를 파괴하는 건 탐욕과 이기심이지 아이들이 아니다. 아이들은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온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이 우리의 선생으로 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복잡하기만 한 세상에서 우리 어른은 아이들만 줄 수 있는 교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아이들은 정직함과 단순함을 바란다. 말에는 반드시 행동이 따르기를 기대한다. 쉽게 화를 내지만 그만큼 빨리 용서한다. 그렇게 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두 번째 기회라는 엄청난 선물을 안긴다. 아이들은 정의와 공정한 규칙을 신봉한다. 모든 것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세상의 위대한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우리를 돕는다. 이런 가치를 정부와 외교 정책, 사업 모델, 환경 정책, 교육 이론에 적용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상해보라.

아이들을 환영하지 않는 사회는 비참하다. 우리 앞에 놓인 장기판은 아이들과 부모와 교사에게 불리해 보인다. 빈부 격차가 심해지면서 기본적인 의식주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가정이 늘어난다. 도시에는 절박한 가정을 돕기 위해 24시간 운영하는 어린이집이 우후죽순 늘어난다. 어쩔 수 없이 장시간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은 부모의 역할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만다. 아침에 아이들에게 옷을 입히고, 밥을 먹이고, 병치레하는 아이를 돌보고, 밤에 아이를 재우는 일을 비롯해 전통적인 부모의 역할을 포기하고 있다.

아이들의 독창성과 능력을 위협하는 새로운 교육 방침이 검증도 거치지 않고 교사와 아이들의 손에 떨어진다. 이런 결정을 내리는 이들은 반대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수십 년 동안 아이들을 위해 일하고 은퇴한 교육자 베벌리 브랙스턴은 현재의 딜레마를 이렇게 요약한다.

우리 사회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을 볼 때 무슨 생각이 드느냐고 물으면, 사람들의 대답은 한결같다. 미디어와 최신 기술에 엄청난 시간을 허비하고, 음란물과 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고, 가족과 보내는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고, 식사는 인스턴트로 대충 때우고, 학업 경쟁으로 인한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야외 활동에 시간을 투자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는 아이들을 염려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물으면 모두 난감한 표정으로 어깨만 으쓱한다. 상황이 지독하게 꼬여 있으니 체념하는 마음도 십분 이해한다. 그렇다고 체념하는 것 말고 다른 대안은 정말 없는 걸까? 눈앞에 닥친 문제가 너무 거대해서 한 번에 해결할 수 없을 때는 매일 만나는 내 아이와의 관계부터 시작하면 된다.

아내 버레나와 나는 대가족 속에서 자랐고 결혼해서는 여덟 명의 자녀를 얻는 축복을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흔네 명의 손자손녀를 주셨고 지금까지 증손자 한 명을 주셨다. 한 명 한 명 소중하고 감사하다.

50년 가까이 함께 살면서 아내와 나는 세계 곳곳을 방문했다. 개발도상국은 물론이고 전쟁이 한창인 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르완다, 이라크, 가자 지구, 분쟁 중이던 북아일랜드를 찾아간 적도 있다. 그때마다 수많은 아이를 만났다. 학교 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지만, 아이들의 열정은 대단했다. 열의에 찬 눈으로 다가와 학교에서 배운 것을 보여주고 노래를 불러주었다. 우리 부부를 따뜻하게 환대했다. 교육이라는 ‘특권’을 얻기 위해 수십 킬로미터를 걸어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들의 얼굴에는 배고픔과 곤궁함의 그늘이 없었다.

극도로 가난한 나라에서 아이들은 국가의 보물이다. 아이들은 단순히 가족의 성姓을 물려받는 존재가 아니라 문명의 미래다. 모든 것이 모자란 빈곤 지역에서도 마을 한가운데 학교를 두고 볼품없는 물건이라도 구할 수 있는 건 모두 긁어모아 공동체 전체가 아이들을 교육하려고 팔을 걷어붙인다.

이런 나라를 방문하고 미국으로 돌아올 때마다 아내와 나는 문화 충격을 받았다. 서구 사회에는 돈이 넘쳐난다. 하지만 그 돈이 어린이집이나 학교로 흘러가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아이들을 교육하는 공간이 우리 사회의 중심이 되고 있는가? 아이들을 국가의 보물로 여기고 있는가? 구매력을 갖추어나갈 미래의 소비자 정도로 아이들을 취급하는 것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답할지도 모른다. 아이들을 독창적인 인격으로 문명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을 존재로 여기고 있느냐고 물으면 “글쎄”라고 답할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하는 논의라고 해봐야 자녀 출산에 관한 찬반 토론이 고작이다. 가계 부담이나 감당할 수 없는 의료비, 교육 부담을 토로하는 것이 전부다.

언젠가 네 명의 자녀를 둔 이웃 스티브, 샤넌 부부와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샤넌은 경제적인 시각으로만 아이들을 바라보는 세태를 이렇게 꼬집었다.

언론과 주변 사람들이 “아이를 기르는 데 이만큼 많은 돈이 든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참 불행한 일이죠. “내게 돈이 얼마나 있지?”라고 물을 것이 아니라 “내가 얼마만큼의 사랑을 줄 수 있을까?” 하고 물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갓 태어난 아기를 처음 봤을 때 “다시 데리고 가요”라고 하거나 “난 원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부모가 어디 있겠어요?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고 기쁨에 압도되지 않는 부모를 보는 날이 정말 와야 하나요?

다른 사람과 나누지 못할 기쁨을 소유하는 건 또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혼자 기뻐한다는 게 가능하기는 할까요? 이기적인 기쁨이요? 기쁨은 나누라고 있는 겁니다. 아이들이 많을수록 주변에 나눌 기쁨이 생기는 것이고 그 기쁨은 자꾸 커집니다.

세상에는 아이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우리가 필요하다. 단순한 생존 보장을 넘어 그 이상의 것을 아이들에게 공급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인도의 시인 라빈드라나드 타고르는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은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관습의 껍질에 싸인 어른과는 달리 펄펄 살아 있는 존재입니다. 아동의 정신 건강 및 발달을 위해 교육을 맡은 학교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사랑의 영이 이끄는 세상이 아이들에게는 절실히 필요합니다.


이 글은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의 책 «아이들의 이름은 오늘입니다»에서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