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3년 11월, 독일 헤센. 125명의 남녀, 어린이로 구성된 브루더호프가 뢴 산지에 있는 한 농장에 설립된 지 얼마 안 된 때였다. 공동체는 국가사회주의 나치 정부로부터 모든 시민들은 이 정권에 대한 승인을 입증하는 국민투표에 의무적으로 참여해야 된다는 새로운 지시를 통보 받았다. 정부 관리는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이 국민투표에 참여하지 않으면 집단수용소에 감금될 거라는 의미심장한 경고를 했다. 이 수용소는 이 정권이 시작된 지 10개월만에 반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 투표의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독일 정부의 정책을 승인하고 이를 동의하며 이 정책이 자기 자신의 확신과 의지의 표현임을 엄숙히 확언하는가?” 공동체는 기도와 토의를 거친 후에 구성원들은 이 투표에 찬성 또는 반대의 표시를 하는 대신에 다음과 같은 의사를 종이에 적어 투표용지에 붙이기로 결정했다.

‘나의 확신과 의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제자 됨,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 그리고 그의 교회의 사랑과 일치에 있다. 이것만이 하나님이 나에게 준 유일한 부르심이다. 이 믿음 안에서 나는 하나님과 인류 전체 앞에서 나의 국민과 나의 조국 그리고 이들의 정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한다. 이 정부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지만 다른 소명이 있으며 이는 나의 부르심이 아니라 친애하는 통치자인 힌덴부르크와 아돌프 히틀러에게 주신 부르심으로써 나의 것과는 다르다.’

당시 신문은 이런 투표를 찬성으로 간주하여 보도했다. 그러나 5일 후 이 작은 공동체는 140명이 넘는 무장 나치 친위대와 게슈타포에 의해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1

모든 작품은 Dids 제공.

여기서 “다른 부르심”은 하나님이 주신 정부의 임무를 위해 공동체 구성원들이 기도하기로 약속한 것을 의미한다(로마서 13:1-5). 이들은 정부의 지도자들을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하는 이”로 여겼다. 이웃과 적(이 경우 히틀러)을 모두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하라는 의미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의사 표현은 국가의 목적이 교회의 목적에 우선할 수 없다는 그리스도인 믿음에 근거를 두고 있다. 국가의 임무는 그리스도의 명령인 모든 사람을 구하고 진리를 알게 하라는 명령(디모데전서 2:4)을 수행할 수 있도록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런 의사 표현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마가복음 12:1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교회와 국가와의 관계에 적용할 때 생기는 애매모호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난 2천년 동안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정치적 권위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분별하기 위해 노력하며 경주해 왔다. 이런 상황은 아나뱁티스트 공동체인 브루더호프처럼 초기 기독교의 정신에 따라 비폭력에 헌신하고 재산을 공유하는 공동체에도 적용된다(사도행전 2, 4장).

나는 1997년 이래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지내왔고, 지난 18년간 공동체의 법무 자문 위원으로 일해 왔다. 그러면서 나는 브루더호프가 지난 100년의 역사에 거쳐 어떻게 정부와 관계를 맺어왔는지 그리고 어떻게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지를 관찰할 수 있었다.

기본적 신념들

세상에 있는 교회

그리스도의 보편적 몸의 일부분에 불과한 공동체로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본보기를 따르기를 원한다. 우리의 부르심은 초대교회에 의해 형성되고 16세기 급진적 종교개혁 당시 아나뱁티스트들에 의해 이어진 나눔의 제자도에 있다. 2 자발적 가난이라는 그들의 모범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우리는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집, 우리가 사용하는 차량들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폭력의 뿌리인(폭력 때문에 정부가 필요하게 된다) 돈의 지배에 실제적으로 반대하는 삶을 추구한다(디모데전서 6:10).

우리는 이 땅 국가의 시민이지만, 국가를 넘어서고 국경에도 매이지 않는 교회의 한 부분이다. 우리 공동체의 100년의 역사 동안 ‘국가’는 때로 독일, 리히텐슈타인, 영국, 파라과이, 우루과이, 한국, 호주 그리고 미국을 의미했다. 조국에 대한 사랑을 부인함이 없이, 우리의 첫 충성은 언제나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있다. 신약성경 히브리 서신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히13:14). 우리의 충성은 우리의 왕 하나님에게 있다.

이것이 우리가 니케아 신조를 믿음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과 공유하는 믿음이다. 신약에 따르면, 현재의 역사적 상황은 역설적이다. 그리스도가 주인으로서 다스리고 계시지만, 그 적들 모두가 항복한 것은 아닌 상태이다(고린도전서15:20-28). 하늘과 땅 모두의 지배자로서 예수님은 죄와 죽음의 세력(세상적인 국가들의 속성)을 이기셨다. 예수의 교회는 그분이 시작한 일이 완결되는 그분의 때를 기다린다(빌립보서 1:6). 악의 세력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전히 그리고 온전히 실현되는 그때까지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잔존할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는 불완전한 세상에서 불완전하게 살겠지만, 그리스도는 교회에 성령의 임재를 통해 당신의 통치가 어떤 모습일지 전조를 보여 주셨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태복음 18:20). 3

국가의 역할

우리는 평화와 기본적인 정의를 유지하기 위해 행정 당국을 합법적으로 운영하는 것을 존중한다(로마서 13:4). 그리스도 성령의 통치 아래 놓인 교회의 유일한 기준은 아가페적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 국가가 교회가 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우리는 공상적 이상주의자들이 아니다. 공동체 설립자 에버하르트는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 교회는 기존의 세상 권력을 무너뜨리는 것에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눈에 국가 권위와 그 사법적 질서는 하나님께서 살인과 증오, 거짓과 속임, 부정의와 불순결을 막기 위해 쓰시는 도구입니다. 우리는 이를 알고 그 제한과 한계를 인식하는 전제에서 세상의 질서를 존중합니다.”4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땅의 법들을 지켜 나가는 것은 당연할 귀결이다(로마서 13:1-5).

일정한 지점까지 그러하다. 피터 리데만은 아나뱁티스트 지도자로서1524년 헤세 주 통치자 필립 왕자에게 했던 변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 땅의 지배자들에게 주어진 권위에 기꺼이 순종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다. 리데만이 나아가 선포했듯이 행정 당국 권위의 한계도 분명한 태도를 취한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반대되는 어떠한 것도, 양심과 우리의 부르심에 반하는 어떠한 것에 있어서도 우리는 사람보다는 하나님에게 복종하기를 원합니다”(사도행전 5:29).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직위를 취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의 생명을 침해할 수는 없다고 믿기 때문에, 사람의 생명을 침해하는 행위에 대한 국가의 지원과 관련된 어떠한 직위에도 관여할 수 없다. 여기에는 아주 분명하게 경찰, 전쟁 그리고 사형제도 등이 포함된다. 브루더호프의 믿음의 선언인 《믿음과 소명》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고위 공직자나 판사, 배심원 등 다른 이들의 생명과 자유, 시민권이나 여타 권리를 관장하는 자리를 직접 맡아 공권력을 행사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는 우리가 공권력을 행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명과 교회의 임무에 부합되지 않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경찰관 등과 군인들처럼 폭력적인 공격자로부터 다른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이들을 깊이 존경한다. 비록 나 또한 나의 친구들을 위하여 기꺼이 내 생명을 내어놓아야 하겠지만(요한복음 15:13), 그리스도의 말씀과 본보기는 나로 하여금 그를 위해 살인을 고려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다. 초기 아나뱁티스트 전도자인 미카엘 자틀러가 1529년 슐라이다임 신앙고백에서 표현했듯이:

칼은 그리스도의 완전함 밖에 있는 하나님의 질서이다. 검은 사악한 자들을 처벌하고 죽이고, 선(善)한 이들을 방어하고 지킨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선을 또는 사랑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악함에 대항하여 칼을 사용해야 하는지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나아가 검의 폭력을 금지하면서 다음과 같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세상의 권세들은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주인행세를 하지만, 너희들 가운데서는 그러하지 않아야 한다”(마태복음 20:25-28 참조).

우리가 세상의 권세가 될 수는 없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는 선출되는 공직에 나서지 아니하지만 준비위원회 또는 프로젝트팀이나 지역의 소방대와 구급대 등에 참여한다. 그리스도인이 공적인 선출직을 유지하거나 폭력과 강제력을 사용하는 자리에서 일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모든 시도는 국가에 대한 교회의 절대적 우선성에 대한 믿음이 결여된 것이라고 우리는 믿는다. 에버하르트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면, “정부의 직책을 맡는 사람은 그리스도가 행하신 것을 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는 로마 황제가 되었든지 아니면 이스라엘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예수가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을 때에 그가 바로 거절했던 것입니다.”5

호주의 브루더호프 멤버들은 뉴 사우스 웨일즈 농촌 소방대에서 자원봉사를 한다. 사진 제공 대니 버로우

그리스도의 평화주의는 자유주의적 평화주의와는 다르다.

이러한 기독교적 평화주의는 정부에 의한 치명적인 폭력의 사용을 축복하거나 ‘정당한 전쟁’ 이론(Just War가톨릭 교회와 주류 개신교계 교회에서 보통 사용)을 지지하지 않는다. 나아가 국가에 대하여 비폭력을 기대하는 자유주의적 평화주의(용어의 모순)도 마찬가지다. 자유주의적 평화주의는 인간성의 선함과 인류의 진보에 대한 이상주의적 관념을 그 기초로 하고 있는데, 이는 속죄되지 않은 세상에서 죄와 악의 실제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결여하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의 접근 방식은 그리스도의 길이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에 국가 권력에 의한 검의 사용을 반대하는 대신 영적 전쟁의 무기를 선호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뜻이 역사 속에서 실현될 것이라는 확신에 근거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이러한 무기들은 상호 헌신과 권면으로, 공적 영역에서는 기도, 사회질서에 대한 비판 그리고 추방이나 심지어 순교를 무릅쓰고 양심에 따르는 시민 불복종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교회가 정치적 제어력에 의존하기보다는 국가 안에서 최고 정의를 위하여 변론하고 최소한의 폭력적 방법을 옹호함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여기에 이상주의가 개입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교회와 세속 사회 사이에는 다른 기준의 정의가 존재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교회는 국가에 대하여 침략적 전쟁과 사형제도를 반대하면서 가능한 최대한의 평화를 추구할 것을 요구한다. 그렇지만 모든 강제력이 제거될 것을 기대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국가가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불평등을 제거하지는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가난한 사람, 고아, 외국인, 노약자 등을 돌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방법을 통해 우리는 환경이 허용하는 한 실제적인 선을 증진하는 길을 찾으면서도,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부르심인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결코 잊지 않는다.

때로 교회는 정치적인 영역에 있어서도 세속 인문주의에서 표현되는 생각을 통해 그리스도의 기준을 증진시킬 수 있다. 자유, 평등, 민주주의, 인권 등의 가치는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진실로 다가갈 수 있다. 왜냐하면 비록 이러한 것들은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인간 존재의 진실을 향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들은 하나님 나라의 정의를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런 가치들은 교회가 국가 권력 남용을 포함하여 세상의 잘못을 비판하는 매개체로서 활용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개념들을 사용할 경우, 우리는 그것들에 매이지 않아야 한다. 정의와 평화의 실현은 세상적인 제국의 진보로 성취되지는 않고 단지 계몽될 뿐이고, 새로운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하고 그리스도의 교회를 이룰 때 성취될 것이다.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그분이 영광으로 다시 올 때 인류가 새로워지면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좌든 우든 이상향적 국가에 대한 환상에 의존해서는 안 되고, 상상에나 있는 과거의 기독교 세계의 황금 시기를 다시 한 번 되풀이 하고자 하는 유혹에서도 자유로워야 한다.6

교회의 사명

정치를 본연의 자리에 두기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적극적인 사랑을 보임으로써 교회 공동체는 속죄 받지 못한 사회 질서와 국가에게 그 존재로 다가올 하나님 나라의 징후를 증거하게 된다.

그러나 교회는 또한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선을 찾고 그들의 종교 자유를 옹호할 의무가 있다. 이것은 국가의 불의를 지적하고, 개선을 제안하며, 통치자들에게 정의와 자비를 촉구함으로써 국가의 책임을 수행하라고 촉구하는 것을 포함한다. 때로 국가는 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데, 그 이유는 국가가 부패하거나, 국가의 모든 시민을 보호하거나 연약한 이들을 지원한 책무를 외면했을 수도 있다.

물론 우리는 국가가(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통치자 아래의 정치 조직체) 그리스도인이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상태에 이르게 될 일은 없다는 것을 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자유 민주주의가(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나 다른 정부 체계들도 역시) 궁극의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다고 기대한 적은 없다. 패트릭 드닌, 아드리언 버뮬 같은 탈자유주의적 사상가들은 자유주의가 실패했다고 봤는데 그런 관찰은 아나뱁티스트의 관점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7

종교의 자유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은 일찍이 종교 자유의 길을 닦았다.8 미국의 권리장전이 쓰여지기 훨씬 전에 아나뱁티스들은 초기 교부들이 주장했던 국가의 강요로부터 자유롭게 믿음대로 살아갈 권리를 주창했다. 1527년 아나뱁티스트의 지도자 한스 뎅크는 이렇게 적었다. “믿음의 문제에 관해서 우리는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강요 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함을 우리 모두는 알아야 한다.” 그때 이미 아나뱁티스트들은 자신들의 지상 권력을 위해 “이건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을 부패하게 하고, 정치적 영역에 전적인 충성을 부당하게 강요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나뱁티스트들의 이런 종교 자유의 원칙은 뒷날 미국 헌법에 반영이 된다.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미국에 피난처를 찾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미국 수정헌법 1조의 종교의 설립 주선과 국교 선정 금지조항은 국가가 종교의 믿음과 실천을 방해하거나 국가가 정한 교리를 도입함으로써 종교를 통제하는 것을 금하고 있다.9

또한 아나뱁티스트의 신념의 연속 선상에서 이런 금지가 종교의 누룩으로써의 역할이 공공의 삶에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71년 미연방대법원이 다룬 레몬 대 커츠맨 사건은 대중의 이해를 흐리게 했고, 긴장한 하위 법원들과 국가 관리들로 하여금 민간의 영역에서 종교가 설 자리를 잃는 것을 지지하게 했다.10교회는 국가에 우선하며 구조적으로 구별되기 때문에 둘을 구별하는 동시에 시민사회의 영역에서 종교의 자리를 두고 신자들의 권리를 확고히 하는데 어떤 갈등이 있을 수 없다. 정부 당국으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았을 때 사도 바울은 시민의 권리를 주장했는데 그건 불쾌감이나 실용주의적인 술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국가가 부당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6:37). 기독교인들이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주장하고 국가에게 자신과 다른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하라고 요구할 때에는 국가로 하여금 정당한 역할을 하라고 일러주는 섬김을 하는 것이다.

실제: 브루더호프의 사례들

하나님 나라의 실질적인 선언으로써 교회 공동체는 존재 자체로 세상에 크게 외치는 바가 있다. 이는 특별히 온전한 제자도의 삶과 겸손한 섬김의 헌신(마가복음 20:25–28), 절제된 성(性, 마태복음5:28)과 소유물을 포기(누가복음 12:13–24)한 삶을 의미한다. 만약 사회정치적 변화를 위한 최선의 전략이 마음과 정신이 닿는 데서 출발한다면 교회는 이를 증거하는 이의 진실성으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브루더호프에서 우리의 임무를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부르신 대로 살려고 애쓰고, 그리스도가 명령하신 대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참여하도록 초대하거나, 그들 나름대로 (그들의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아가도록 격려하는데, 그것은 우리의 삶과 매우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삶의 모든 측면을 요구하는 복음에 대한 증거의 진실성은 정부와 우리의 상호작용에도 영향을 끼친다. 때때로 이러한 상호작용은 강제적이기고 때로는 자발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때때로 이러한 상호작용은 적극적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교회가 공적인 부당함에 대해 권위를 행사할 때, 국가에게는 골치 아픈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되어 왔을까?

강제적 상호작용

우리는 선량한 시민이 되고 법을 따르려고 노력한다. 국가와 맺는 수많은 강제적 상호작용에서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반영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취약한 사람들을 보호하는 법(아동보호법이나 예방접종법)이나 세금 납부가 그것이다. 학교, 사업, 병원, 치과, 농장 등의 업무를 할 때 우리는 마태복음 22장 21절과 로마서 13장 11절의 요구를 적용하려고 한다.11 그러나 국가의 요구가 양심과 상충할 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에게 복종하기 위해서는 법을 어길지라도 거부해야 함을 분명히 해야 한다.

비폭력에 헌신한 교회로서 군대 징집 역시 위에 말한 원칙이 적용되는 영역 중 하나이다. 1930년대에 징집 대상자였던 브루더호프의 젊은이들은 히틀러의 군대에 복무하는 대신 자발적으로 망명을 택했다. 1937년 게슈타포에 의해 강제 해산된 브루더호프가 영국에서 다시 공동체를 형성했을 때에 다시 군대 징집의 도전에 직면하게 됐다. 당시에는 많은 영국인들이 "전쟁의 근원이 되는 모든 것을 제거하기 위해 노력"할 방법을 찾기 위해 브루더호프에 합류하는 상황이였다.12 영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동원되었을 때, 그들은 군 심사위원회에서 자신들의 소신을 변론해야 했다.

이 젊은이들 중 한 명은 케임브리지 교육을 받은 엔지니어 프레드 굿윈이었다. 그는 조사위원회에서 "나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법을 준수하고, 법이 하나님에 대한 나의 충성과 충돌하지 않는 한 국가가 바라는 바를 충실히 수행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나는 대체복무를 받아들일 수 없다. 그 이유는 내가 브루더호프에서 자유롭게 일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동료들을 도우며... 내가 할 수 있는 바를 최선을 다해 ... 평화로운 때나 전시 때나 신약성경과 초대교회의 모범에 근거한 공동체 생활의 증인으로서 내 몫을 다하길 바란다.”

히틀러를 위해 싸우는 것에 대한 거부도 일이지만, 히틀러에 맞서 싸우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더한 일이다. 평화주의는 사람들이 가장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아나뱁티즘의 한 면모일 것이다. 그러나 평화서약협회(Peace Pledge Union)의 창립자인 딕 셰퍼드가 말했듯이 "기독교 평화주의의 핵심은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은 결코 옳지 않다는 믿음이다. 부도덕한 무관심이나 비겁함 같은 의미의 침묵주의와는 전혀 무관하다. 그 근거는 공리(功利; utilitarian)적이지 않다.... 기독교 평화주의는 삶의 건설적인 철학이다. 무조건 악에 굴복하는 것은 아니다.” 13

프레드 굿윈은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자 지위를 부여받았고, 모든 브루더호프 남성들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에서 적대감이 고조되면서 영국 브루더호프에 살고 있는 독일인들은 억류 대상인 적국 외국인으로 분류되었다. 이때 놀라운 영국 정부의 선처로 그들은 억류되는 대신 징병대상 연령자를 포함한 브루더호프의 모든 구성원들이 한 그룹으로서 출국할 가능성을 제시받았다.14 브루더호프의 목적지로 파라과이를 선택한 것은 부분적으로 메노나이트가 병역 면제의 길을 열어놓았기 때문이다. 베트남 전쟁에 따른 징집은 수십 명의 젊은 브루더호프 남성들이 어떤 상황에서도 살인이 잘못되었다는 확신을 다시금 변론하도록 했다. 병역신고위원회와의 협의가 이루어져 브루더호프에서 이루어지는 봉사 활동이 대체 복무로 인정이 되었다.

프레드 굿윈과 영국의 브루더호프의 멤버들이 농장에서 일하는 사진. 사진 출처: 브루더호프 문서보관소

자발적 상호작용

다섯 자녀의 아버지이며 변호사로서 나는 종종 국기에 대한 맹세로 개막되는 민간 행사에 참석한다. 또한 고등학교 축구팀의 코치로서 애국가로 시작하는 많은 경기에 참석해왔다. 다른 브루더호프 멤버들처럼 나도 애국가 제창은 존중하지만 동참은 하지 않는다. 애국가가 연주될 때, 많은 사람들은 가슴에 손을 얹지만 우리 브루더호프 멤버들은 그러지 않는다. 이런 축제적인 순간에 이런 거부 행위는 흉해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는 비록 하나님께서 주신 국가의 권위와 나라에 대한 자연스런 사랑을 존중할지라도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 충성 대상은 하나님 나라라고 여긴다.

이런 점을 두고 지나치게 세심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대 기독교인들이 인식했듯이 종교의식의 성격을 지닌 애국적 관행을 경계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기독교인은 항상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충성을 선언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1930년대 브루더호프 멤버들은 하일 히틀러 경례('히틀러로부터 구원을'로 이해할 수 있는) 사용을 결연히 거부했다. 오늘날,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런 경례를 명백히 우상숭배라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당시 독일의 다른 기독교인들 중에는(디트리히 본회퍼나 칼 바르트와 같은 반나치 영웅들조차도) 일관되게 이 경례를 거절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15 확실히 이것은 당시에 기독교인의 양심을 둔하게 만드는 데 작은 기여를 했다.

반대로 투표는 충성의 문제가 아니라 도덕적 책임의 문제다. 투표의 여부와 방법은 브루더호프 멤버에게 양심의 질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토론하기도 하고 때때로 서로에게 동의하지 않는다16 투표에 참여한 신자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후보자가 나중에 내릴 수 있는 잘못된 법안 결정에 연루되는 걸까? 전쟁광이거나 타락한 후보에 반대 투표하지 않는 것은 무작위의 죄인가? 어떤 브루더호프 멤버들은 투표를 하지 않고, 또 어떤 이들은 후보의 정책이 우리 지역 복지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지방선거 투표에만 참여한다. 어떤 이들은 투표가 정치력 행사를 자제하는 아나뱁티스트의 입장과 모순된다고 보고, 다른 이들은 투표를 유용한 증거 수단으로 보고 있다. 이곳 뉴욕 주에서 우리는 지역 학군의 납세자로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 이해한 바에 따라 아동과 가정을 지원하는 예산에 우선순위가 주어지도록 지원한다. 그리고 (더 이상 시급한 문제가 걸려 있지 않다면) 부패한 후보들에 대한 투표를 거부하는 것이 때때로 우리의 삶을 증거하는 데 효과적인 방법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거나, 국가의 강압적인 힘으로 종교적 비전을 강요하기 위해 투표하지 않는다. 동시에, 정치적 절차로부터 완전히 분리되면 사실상 현상유지에 투표하는 셈이 되고, 개인과 집단적 무관심의 표현이 될 수 있다. 브루더호프는 모든 정책 이슈에 대해 입장을 취하지 않으려 하지만, 사안이 중요해 보일 때 다른 사람들과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우리가 정부에 영향을 미치는 일에 관여하더라도 권력의 유혹에 경각심을 갖고, 심지어 선한 방법이라 할지라도, 정부에 관여하는 것이 항상 기독교인의 시간이나 에너지를 가장 잘 이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일부 브루더호프 멤버는 자신이 선택한 정당에 등록하지만, 특정 정당이나 후보가 '기독교인의 선택’과 동일시 될 수 없다는 점을 모두 분명히 하고 있다. 타협은 정치의 속성이기에 영원한 진리에 관해 답을 줄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는 특정 당의 강령 전체를 채택할 수는 없다. 우리는 또한 신자들 내의 분열을 야기할 수 있는 과잉된 당파적 감정의 노출을 경계한다. 우리 공동체는 정당과 제휴하지 않기 때문에, 지역에 선출된 관리들과 다른 지도자들을 소집하여 열린 대화와 신뢰의 환경에서 소통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내 경험상, 정치적 스펙트럼을 초월하여 다른 기독교인들, 그리고 실제로 타 신앙인이나 무신론자와 공통점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사람에게 확장되어야 하기에 교회는 어떤 특정 정당만을 지지할 수 없을 것이다. 만약 빈곤과 인종적 부당성을 퇴치하는 것이 성경적인 이슈라면, 결혼이라는 신성한 유대감과 출산의 목적도 분명히 그러하다. 그 견해들 중 일부는 자유주의적으로 보이고 다른 부분은 보수적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만물에 대한 복음의 충실함이다.

그래서 브루더호프 목회자들은 재소자 사역뿐 아니라 법 집행자들의 목회자 역할도 하고 있다. '폭력의 고리 깨기(Breaking The Cycle)'는 우리가 학교와 다른 포럼에 제공하는 비폭력 분쟁 해결 프로그램으로, 오늘날 젊은이들이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한다.17 우리는 낙태를 반대할 뿐만 아니라, 출산 가정을 지원하고 건강하고 책임 있는 관계에 대한 교육에 투자한다. 우리는 의사의 도움을 받는 자살(안락사를 뜻함. -옮긴이)을 반대하는 동시에, 지역 호스피스나 노인 요양 시설에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복잡한 이민 문제에 대한 정책적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어도 멕시코 국경지역의 수용소와 중동 난민 캠프의 아동 친화적 공간에 일꾼들을 지원할 수 있다.

적극적인 상호작용

그리고 신자와 교회가 양심에 따라 비타협적인 대응 여부를 분별해야 할 급박한 역사적 순간들이 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교회는 국가의 권력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교회가 상징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모두를 지탱하는 사랑의 힘입니다. 그러나 국가의 가장 내적인 의미를 찾는 것이 교회의 관심사입니다. 교회의 과제는 사회 정의와 평화를 위하고, 모든 것을 아우르는 사랑을 위해 정치적 삶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성령에는 영적인 영향과 도움을 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 내재되어 있고 이를 통해 교회에 생기를 불어넣습니다.”18

40년 지난 후에 마틴 루터 킹 주니어가 버밍엄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 지적했듯이, 하나님께서 국가들에게 정의를 보존할 권한을 주신다면 기독교인들은 부당한 법을 향한 대항을 옹호해야 한다. 1960년대 미국의 다른 교회들처럼 브루더호프도 시민권운동의 발전을 밀접하게 따랐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람들과 연대하기 위해 남부 쪽으로 이동함에 따라, 브루더호프 멤버들은 동등한 투표권과 차별 철폐와 같은 "정치적" 목표를 추진하는 것이, 공동체가 늘 망설이던 질문, 즉 정책 문제에 관여한 것이 맞는지를 두고 토론했다. 결국 우리는 참가해야 한다는 데 결론을 내리고 대표단을 앨라배마 주 셀마와 조지아 주 애틀랜타로 보내 킹 목사와 나란히 행진했다. 1964년 5월 브루더호프 목회자 드와이트 블라우가 보낸 편지에 킹 목사는 이렇게 답했다. "만약 우리가 이 일에 성공한다면, 우리가 믿는 것처럼 이 나라는 실제로 사랑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것처럼, 우리나라가 인류의 진정한 형제애 그리고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심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브루더호프의 고등학교 학생들이 세이브더칠드런 액션 네트워크와 협력하기 위해 워싱턴 D.C.를 방문한 사진. 사진 글쓴이 제공

그 후 몇 년 동안, 브루더호프 멤버들은 해외 전쟁 참여 반대와 국내의 가난한 사람들이 겪는 해로움에 항의하기 위해 정부 지도자들과 계속해서 만남을 가졌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공립 학교 환경 개선을 포함한 아동과 가정에 이익이 되는 정책, 사형제도와 안락사 반대, 그리고 일관된 삶의 윤리를 증진시키기 위한 노력,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과 소수 인종들에게 불공평하게 가중된 사법 제도의 개선을 촉구해왔다. 브루더호프 학교의 수업들은 일상적으로 런던, 캔버라, 워싱턴, 뉴욕, 알바니 같은 국가의 수도들과 주의 수도들을 현장 답사하여 정부와 정치에 대해 배우고 현재 이슈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 학교의 청소년들도 세이브더칠드런, 월드비전, 옥스팜과 같은 단체들을 지지하는 행사에 함께 참여한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는 그 자체로 가정생활, 취약계층과 노인 돌봄, 자녀 중심 교육, 노동의 존엄성, 절제 있는 소비 그리고 책임 있는 리더십의 필요성을 사회에 증언한다. 우리의 관심사에는 종교적 자유, 즉 생명의 신성함과 결혼이라는 신성한 언약에 대한 존중과 같은 영원한 진실을 표현하고 실천할 수 있는 자유도 포함된다. 이런 증거를 위해 브루더호프는 종교와 상관없이 정부 내외 협력 인사들을 환영한다. 우리는 손발이 되어 믿음을 지역 차원에서 실행하는데 이는 적십자사, 가톨릭 자선단체, 유나이티드 웨이, 보이 걸 스카우트연맹 같은 사회봉사단체와 협력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소명

1933년 독일 국민투표의 여파로 나치 친위대들은 하루 종일 헤세 지방의 공동체 건물들을 뒤졌고, 브루더호프 멤버들을 차례로 심문했다. 그들은 체포하지 않은 채 떠났지만, 책과 서류를 압수해 갔다. 브루더호프가 이민을 떠나는 것이 현명할 거라고 제복 입은 남자들이 말했다. 다른 많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독일 총통이 구상한 독일에 브루더호프가 설 자리는 없었다. 투표 당일 저녁 모임에서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공동체 식구들에게 말을 했다. 그의 말은 매우 위험한 순간에 교회가 국가에 어떤 증거를 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

우리가 한 개인이나 여러 사람에게 다가가 하나님 나라에 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선물입니다... 그러나 복음의 진리를 증거하는 역사적 실제와 직면하게 되는 것은 더 위대한 일입니다. 무기가 넘쳐나는 세상 한 가운데에서 사랑과 평화, 정의의 길을 대표함으로써 역사를 만드는 일에 참여하는 소명이 더더욱 필요합니다. 폭풍같은 역사적 사건들에 둘러싸인 이때 우리는 흔들림 없이 삶으로 이를 증거하라는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소명입니다. 현 시대 마귀에 사로잡힌 종말적 사건들의 끔찍한 모습 앞에서 최종의 일치된 행동을 조용히 수행하는 것입니다. 완전한 일치와 신실함, 완전한 사랑과 용서, 완전한 선과 진리, 그리고 완전한 순복과 신뢰로 일치의 행동을 하며 다음과 같이 외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오고 있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937년 4월, 독일의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다시 급습되어 게슈타포의 명령에 의해 해산되었다.19

아나뱁티스트의 역사는 신자들이 양심을 위해 목숨을 바치거나 다시 한 번 난민이 되더라도 양심적 입장을 취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러한 대담성은 사유재산으로부터의 자유와 모든 삶의 실제를 넘어 하나님 나라가 우선임을 표현하는 공동체적 삶에 의해 강화된다. 이것은 도피가 아니라 대중 앞에서 증인으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장거리 경주는 정치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라 확신한다. 그동안 우리는 성경을 통해 너무나 장엄하게 묘사된 하나님의 정의가 약속된 나라를 기대하면서, 현 사회질서 안에 선을 위해 구체적으로 일하며,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우리 주님을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날을 기약한다(이사야 11:9).

주註

  1. 다음 참조. Thomas Nauerth, Zeugnis, Liebe und Widerstand: Der Rhönbruderhof 1933–1937 (Schöningh, 2017). 다음 자료 참조. An Embassy Besieged: The Story of a Christian Community in Nazi Germany (Wipf and Stock, 2010).
  2. 이 부분 전체를 읽으려면 다음 참조. John D. Roth.,The Anabaptist Vision of Politics
  3. N. T. Wright, Simply Christian (Harper Collins, 2006), 126.
  4. Eberhard Arnold, “Jesus and the Future State,” public lecture, Berlin, April 1919 (Bruderhof Historical Archive, EA 19/1).
  5. Eberhard Arnold, remarks to a Bruderhof members’ meeting, January 1931 (Bruderhof Historical Archive, EA 35/31).
  6. 미국의 유토피아 진보주의의 역사와 사례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Richard Rorty, Achieving Our Country(Harvard University Press, 1999).
  7. 예를 들어 드닌(Deneen)의 다음 최근 저서를 참조. Why Liberalism Failed(Yale University Press, 2018) and Vermeule’s review “Integration from Within” in American Affairs, Spring 2018, org.
  8. Harold Bender, “The Anabaptists and Religious Liberty in the Sixteenth Century,” Mennonite Quarterly Review 29 (1955), 85.
  9. 결국 우리의 아나뱁티스트 선조들은 유아세례와 현체설을 거부하는 등의 이유로 이단으로 지목 받아 정부 관리들에 의해 화형을 당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조. Thielemann von Bracht, Martyrs Mirror(first published 1659), trans. Joseph Sohm. 또한 다음을 참조. “Church Autonomy and the Free Exercise Clause” in James Serritella, ed., Religious Structures under the Federal Constitution (Carolina Academic Press, 2006), 133.
  10. 사람들은 종종 제퍼슨의 유명한 말 “교회와 국가 사이의 분리의 벽”을 오해한다. 제퍼슨의 이 ‘벽’이라는 은유는 믿음과 정부 사이의 분리가 아니라 교회 기관들과 국가 사이의 분리로 이해되어야 한다.
  11. 사실 그저 법률을 준수하는 것만이 교회가 할 일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범은 우리가 갈망하는 도덕과 윤리, 행동의 기준을 정립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일을 어떻게 생각하고 수행하는지에 관해서는 다음을 참조. ‘공동노동’ - 《우리의 믿음과 소명》Bruderhof.com) 그리고 존 로즈, “기독교 사업이란 모순된 말인가?<계간쟁기>, 2019년 여름호
  12. 12. 이 표현은 딕 세퍼드 목사의 평화서약협회 140,000명 회원이 서명을 한 문서의 일부이며 퀘이커 창립자인 조지 폭스가 1651년 군사 위원회직 제안을 받고 다음처럼 답변한 것에 기초한 것이다. “나는 일체의 전쟁 가능성을 없애기 위해 삶과 힘을 내주는 그런 가치의 삶을 살았습니다.”
  13. “The Christian Attitude to War,” sermon preached 1937, printed in Walters, Kerry, ed., We Say No! The Plain Man’s Guide to Pacifism (Wipf and Stock, 2013), 132.
  14. Ian Randall, A Christian Peace Experiment: The Bruderhof Community in Britain, 1933–1942 (Cascade, 2018).
  15. Nauerth, Zeugnis, Liebe und Widerstand, 286.
  16. 호주에 사는 브루더호프 멤버들에게 투표는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연방 선거와 국민투표는 의무이며 불참시 벌금이 부과된다.
  17. 다음 웹 페이지 참조. breakingthecycle.com.
  18. Arnold, “Jesus and the Future State.”
  19. 세 명의 멤버가 체포되었고(나중에 석방) 나머지 공동체원들에게는 24시간 내에 독일을 떠나라는 명령이 주어졌다. 이에 관한 전문은 다음에서 확인할 수 있음. Emmy Barth, An Embassy Besieg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