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나는 고향인 노스캐롤라이나의 코니토 지역에서 너무 많은 사람이 젊은 나이에 죽어간다는 걸 알았다. 한 해에 서른두 살 아래의 교인들 장례식을 서른 번이나 치렀다. 죽음의 원인은 좋지 않은 식습관과 운동 부족 등 건강과 관련이 있었다. 교인의 3분의 2 가량이 비만이었다. 평균 체중보다 45kg 넘게 나가는 교인을 주일마다 보면서 아무 말도 안 한다는 게 양심에 걸렸다. 그런 사람은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고 그러면 우리는 다시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 인생의 절반인 사반세기를 목회자로 섬겨오던 나는 그제야 내가 설 강단은 교회 건물을 넘어서야 함을 깨달았다.

코니토는 한때 목화 농장이 즐비했던 작은 마을이다. 한마디로 “식량의 사막”이었다. 신선한 채소를 찾아보기 힘들었고 설령 있더라도 사람들은 살 돈이 없었다. 문득 신선하고 건강에 좋은 식품을 손수 기르면 된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공동체 밭과 ‘가족생활센터’를 열고 여름학교 프로그램의 하나로 아이들이 몸을 직접 쓰면서 건강한 먹거리를 기르도록 했다.

공동체 밭에서 토마토를 수확하는 중 (사진: 리처드 조이너 제공)

고통스런 ‘농사’의 기억

어떤 사람에게는 농업이라는 말이 낭만적으로 들릴지 모르지만, 나에게는 어려운 성장기의 기억으로 남아있다. 우리 집은 농장 주인을 위해 일하는 소작농 가족이었고 나는 열세 아이 중 하나였다. 농장 주인이 급료를 덜 주자 실망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거다. 아버지는 그런 불의에 맞설 수가 없었다. 가족이 어떤 처지에 놓일지 뻔히 아셨기 때문이다. 농장들은 아버지가 열세 명의 남자아이들(내 형제들과 사촌들)을 뒀기 때문에 고용했다. 나는 아버지가 가난과 싸우고 어머니가 실망하는 모습을 보고 자랐다.

아버지와 판박이였던 나는 그 운명을 피하려고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군에 들어갔고 독일 지역에서 복무했다. 나는 조직과 질서 의식을 좋아했으며 해외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는 주 방위군에 편입됐다. 2001년 나는 코니토의 교회를 섬기라는 부르심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오랜 세월 설움을 간직한 곳에서 미래를 일구기 위해 다시 돌아온 터였다.

코니토에서 우리만의 밭을 시작한다는 말은 노동의 열매가 우리 것이 된다는 걸 뜻했다. 우울한 역사를 새롭고 희망적인 역사로 다시 쓸 기회였다. 동시에 나는 오래된 기억과 싸워야 했다.

공동체 밭을 시작한 지 거의 10년이 된 지금, 이 땅은 우리 공동체의 몸과 영혼을 먹이는 곳으로 탈바꿈했다. 처음에 공동체 일원 몇 명이 기증한 8천 제곱미터(약 2,400평)의 땅으로 시작한 것이 지금은 군 곳곳에 퍼진 열다섯 곳의 농장으로 성장했다. 그중 제일 큰 농장은 10만 제곱미터(약 3만 평)의 땅에 밭 넷, 비닐하우스 둘, 그리고 벌통 150개를 갖추고 있다. 젊은이들은 나이 든 이들에게 배우며 고된 일을 도맡아 한다. 나이 든 세대는 젊은이들에게 농사를 가르치며 소작농의 경험과 주린 배를 채워주던 가족 밭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사진: 리처드 조이너 제공

코니토에 일어난 놀라운 변화

이곳에서는 지속하는 변화를 직접 볼 수 있다. 우리는 방과후 학교와 여름캠프 프로그램을 열어 아이들에게 농사를 계획하고, 씨앗을 심고, 열매를 수확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그러면 아이들은 수확물을 농산물 직판장, 도로의 휴게소, 식당 등에 내다 판다. 벌통에서 거둔 꿀은 팔거나 지역의 저소득층 이웃과 나눈다. 농산물 대부분은 지역에서 소화하지만, 사업을 통해 한 해에 약 570만 원의 소득도 올린다. 묘목을 키워서 개인과 기업에 판매하기도 한다. 우리가 만드는 꿀은 120km 떨어진 롤리 지역의 슈퍼마켓 진열된다. 그렇게 얻은 이익은 학교 교재 구매비와 장학금으로 쓰인다. 이제는 전보다 많은 젊은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해서 대학으로 진학하니 밭에서 얻은 이익 덕을 톡톡히 보고 있는 셈이다.

어른들은 이 일에 시간을 보탠다. 숙제를 돕거나 차량 운행을 맡고, 밭에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일손을 거든다. 그리고 일요일이 되면 ‘일요 건강 저녁 식사’에 참여한다. 그곳에서 젊은이들은 밭에서 손수 기른 건강한 음식재료로 요리해서 “적당한 양”을 상위에 올린다.

철이 바뀌면서 코니토는 더 건강하고 튼튼한 마을로 바뀌고 있다. 많은 사람의 체중이 줄었다. 병원 응급실을 찾는 사람이 줄었고, 감사하게도 사망자의 수도 줄었다.

코니토를 찾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어떻게 이 일이 가능했는지 묻는다. 우리 교회는 이스트캐롤라이나의 브로디 의과대학이 운영하는 당뇨와 심장병 연구사업에 다른 교회들과 함께 참여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협력사업은 사람들의 건강을 향상해왔다. 21개에 군의 여러 지역 교회들이 우리의 공동체 밭을 모델을 실천하고 있다. 건강의 씨앗을 한 이랑, 두 이랑, 그리고 뜰 전체에 하나하나씩 차례대로 심어가는 것이다. 기르고 성장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는 중요한 교훈을 우리는 빠뜨리지 않고 나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 밭은 공동체의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 잡고, 육체와 영혼을 지탱하는 자양분을 제공한다. 이곳에서는 모두에게 역할이 있고, 모두가 발언할 수 있으며, 모두가 변화를 이끌 수 있다.

은이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그런 자부심은 아이들이 당당하게 서서 말하는 모습에서 저절로 풍긴다. 공동체의 나이 든 분이 어린아이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아이가 튼튼하게 자라서 세상에 좋은 일을 하라는 축복의 기도를 하는데 실제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걸 우리는 목격한다. 그것은 지속하는 변화이다.

노동을 통해 일어나는 치유와 회복

육십이 넘은 나이에 나는 아직도 어린 시절의 아픈 기억이 치유되는 경험을 한다. 젊은이들이 농장에서 배우며 즐겁게 지내는 걸 지켜보노라면 소작농의 아들로서 느꼈던 굴욕감이 극복된다. 내가 언제 세상을 뜰지는 모르지만, 한때 내 속에 품고 살던 분노는 놔두고 갈 게 분명하다.

몇 년 전에는 공동체의 한 아이가 교회 돈을 훔쳐간 적이 있었다. 교인 몇 명은 아이가 처벌을 받아서 제대로 된 교훈을 얻길 바랐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일을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맡기기로 했다. 코니토의 십대 아이들이 검사를 찾아가서 담판을 지은 끝에 그 아이는 공동체 밭에서 사회봉사 활동을 하라는 판결을 받았다. 이제 그 아이는 제 삶으로 돌아왔다. 지역의 대학을 다니고 있고, 거의 매주 일요일 교회에서 얼굴을 볼 수 있다.

아이들이 보여준 도덕적 리더십은 십대 아이들이 지닐 수밖에 없는 아픔과 소극적 성향에 잘 듣는 처방전이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배우듯이 우리도 아이들에게서 배운다.

그렇게 함께 우리는 십 년 전 처음에 밭을 일구면서 꿈꾸던 일을 이뤄가고 있다. 영적이며 육체적이고 경제적인 치유에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리처드 조이너 목사 (사진: 리처드 조이너 제공)


*이 글은 <복음과 상황> 297호에도 실렸습니다. (20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