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첫 학기를 맞아 아이들을 근처 공립학교로 보낼 무렵, 두 개의 기사를 읽게 되었다. 그 기사는 부모들에게 아이들을 공교육체제에 맡겨도 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지역 신문에 실려 있던 첫 번째 기사는 시카고 근방에 있는 학교들의 빈곤율을 다루고 있었다. 가장 크게 빈곤율이 증가했던 지역이 바로 우리 아이들의 학교가 있는 곳이었다. 해당 지역 76 퍼센트 이상의 학생들이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이기에 많은 학생들이 배가 고픈 채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그러한 아이들의 성적은 계속해서 하락하고 있었다.

두 번째 기사는 남침례 신학교의 알 모흘러(Al Mohler) 총장이 기독교인 부모들에게 ‘계속해서 공교육을 선택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었다. 모흘러씨는 <앤서스 Answers> 잡지에 실은 글을 통해서 공교육과 관련된 여러 사상적 문제들을 다룬 후, 기독교적 세계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공교육과 관련된 문제의 심각성을 이해하는 기독교인 부모라면 공교육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분명 공립학교는 문제가 있는 곳이다. 여론 조사를 통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흘러씨의 주장에 동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고, 인터넷을 조금만 검색해 봐도 기독교인 자녀들을 공교육체제에서 빼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많은 글들을 찾아 볼 수 있다. 나와 같은 신앙과 비슷한 교육수준을 갖고 계신 주변 분들도 자신의 아이들을 공립학교에 보낼 생각을 깊이 해보지 않았다고 이야기 한다. 따라서, 공교육 대신에 가장 많이 선택하는 것은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내거나 가정에서 직접 홈스쿨을 하는 것이다. 시간과 돈을 조금 더 투자해야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 아이들을 일찍 하나님의 나라에 뿌리내릴 수 있을 것이라 여긴다.

하지만, 세상의 빛이 되는 그리스도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이렇게 선택한다면 공립학교는 더욱 어두운 곳이 될 것이고, 그곳에 남겨진 아이들은 어떻게 될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문제가 많은 공립학교를 포기하고 떠나는 것과 아니면 그 곳에 함께 포함되어 가는 것 중 어느 것이 기독교인으로써 옳은 선택일까?

우리 가족은 하나님께서 바로 이곳, 시카고 교외에 그의 나라를 이루고자 하심을 깨닫고 이사를 오게 되었다. 다른 사람들처럼 우리도 좋은 거주지와 지역사회, 그리고 살기 안전한 곳을 원한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따르는 자들로써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나타내는 빛과 소금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 아이들을 빈곤하지만 다양한 인종이 공존하는 이 지역 공교육체제 안에 등록시킨 것은 삶의 큰 선택이었다. 이곳으로 이사오기 전, 우리는 꼭 해야 할 숙제처럼 생각하며 이 지역의 교육수준과 인구 분포율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고 공부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지역의 가난함과 종종 발생하는 이민자들과 관련된 복잡한 문제들로 인해서 많은 걱정과 부담이 우리 안에 있었음을 보게 된다. 왜 그렇게 많은 가정들이 이러한 우려들이 있는 이 지역을 피해 더 좋은 곳을 찾고자 하는지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미국 시민권을 갖은 1세대의 이민 가정의 자녀들이 어떻게든 살아보고자 열심히 노력하고 공부하는 것을 볼 때에 백인 자녀들을 더 좋은 교육환경으로 보냄으로써 잃어버리게 될 교육적 혜택들이 떠오른다. 신실한 그리스도인 가정들이 공교육을 떠나게 되면서 그 가정들이 가지고 있는 재능과 재정, 믿음을 공립학교에 있는 아이들과 함께 공유할 수 없음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파온다. ‘그 지역으로 이사 가신다면 절대 아이들을 그 곳의 공립학교에는 보내지 마세요’ 라는 선의의 조언을 들을 때면, 마음 속에선 ‘하지만, 그곳이 바로 그리스도인 자녀들을 필요로 하는 곳인걸요’ 라고 외친다.

그렇지만 이러한 이유로 인해서 우리 아이들을 희생시켜 공립학교에 작은 선교사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아이들에게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모든 가족과 교회들이 함께 공립학교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그리스도인들이 지역사회에 깊이 관여하게 될 때에 우리는 더 이상 우리의 아이들과 지역사회를 두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 (렘 29:7) 라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선포한 것처럼 우리 아이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리스도를 세상에 알리고 다른 이들을 배려하며 다른 문화를 이해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부모들과 교회가 함께 지역사회에 깊이 참여함으로 우리 아이들은 이러한 태도들을 공립학교 안에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우리 지역사회의 빈곤율보다 공립학교의 빈곤율이 더 심각한 상황이다. 부모들이 자신의 아이들을 공립학교에서 빼낼수록 공립학교들은 그러한 가정들로부터 받던 힘과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되어 점점 가난해지고, 더 많은 가정이 학교를 떠나게 하는 요인이 된다. 따라서 학교를 떠날 만한 능력과 여건이 되지 않는 가정들만이 학교에 남게 되어 학교들은 지원이 끊긴 채 어려운 숙제들만 잔뜩 앉고 가게 된다. 우리는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야 한다. 학교를 떠나는 대신에 함께 하는 선택을 하게 될 때, 우리는 공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학교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것이다.

문제가 있는 학군 안에 있을지라도 공립학교를 선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망과 정의, 구원을 실현하는 것이다. 우리가 공립학교를 선택하는 것은 별 생각 없이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공립학교에 더욱 마음을 쏟고 물질적으로도 도움을 주기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 가정이 가진 것이 비록 작지만 조금이라도 우리가 사는 지역사회에 도움을 줌으로써 이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실현되길 원한다. 그리고,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비록, 비관적인 통계수치와 아이들의 떨어지는 성적이 우리 앞에 놓여 있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변화를 위해 함께 일하는 헌신적인 선생님들, 관리 책임자들 그리고 부모들이 있다. 가장 어둡다고 생각하는 곳에서도 여전히 하나님께서는 일하고 계신다.

공립학교를 선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소망과 정의, 구원을 실현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섬기시기 위해 자신이 갖고 계신 특권을 내려놓으셨다. 자신의 손이 더럽혀지는 것을 상관하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그 어떤 유혹이나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으셨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른다면, 감내해야 할 부분을 따져보고 우리의 십자가를 짊어지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특권을 내려놓음으로 다른 이들을 섬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빛을 바구니 아래 감추어 두는 것이 아니라 등경 위에 두길 원하신다. 공립학교를 떠나버림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정작 빛을 가장 필요로 하는 곳을 어둡게 만들고, 우리의 집과 교회라는 보호막 아래 우리의 빛을 가두어 두었다. 존 퓨더(John Fuder)는 자신의 책, <이웃 알아가기Neighborhood Mapping》(한국어 미발간)에서 교회는 지역 사회에서 진실되고 신뢰 있는 구성원이 되어 이웃들을 섬겨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다. ‘우리 아이들을 더 좋고 안전한 학교에 보내기 위해 ‘나쁜’학교에서 빼낼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모델로 삼아 우리가 자신의 특권을 내려놓고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자들과 함께 살아가길 원하신다.’ 지금까지 교회는 우리 아이들을 위한 개개인의 선택이 공동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직접 나서서 관여하지 않고 지켜만 봐왔다. 우리의 아이들과 보물이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마음이 있는 곳이다. 우리의 마음, 아이들 그리고 물질적 헌신이 우리의 이웃과 함께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훈은 인생을 변화시키는 힘을 갖고 있고, 우리 나라의 아이들은 위기 가운데 있기에 우리는 그러한 문제를 바로 바라보고 도망치기보다는 부딪치고 깊이 관여해야 한다. 우리 자녀들이 그리스도를 알도록 키울 뿐 아니라 이 지역사회에 구원과 평화를 구하며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이 이 곳을 빛과 소금 그리고 새 생명으로 가득 채우도록, 산 위에 빛을 둘 수 있도록 키워야 한다.


상반된 견해를 보이고 있는 파이슬리 힐러가이스트의 ‘내가 홈스쿨링을 하는 이유’라는 제목의 글을 읽어보세요. 아래에, 독자 여러분의 견해를 써주시고 토론에 함께 참여해주세요.

번역: 조남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