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년 전에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창립 10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 책자를 만들기 시작했다.  '각 개인은 자기희생과 순종을 동반한 평생의 부르심을 왜, 어떻게 확신하게 되는가?' 하는 소명에 오랫동안 관심이 많았던 나는100주년 기념 책자의 초점을 공동체의 1세기 역사보다는 오히려 그 역사에 참여한 사람들의 소명 이야기에 맞추기로 편집위원들과 결정하고, 100년의 시간을 의미하는 100개의 이야기를 싣기로 야심찬 합의를 보았다. 즉시 브루더호프의 동료들을 인터뷰하면서 그들은 왜 '전적인' 기독교 공동체의 삶을 선택했는지, 그 과정에서 얻게 된 통찰은 무엇이었는지 물었다. 동시에 영국인 사진기자 대니 버로우스와3개 대륙에 흩어져있는 브루더호프 공동체 10곳을 동행 방문하면서 함께 하는 우리의 삶을 취재했다. 아래 이야기는 대니의 놀라운 사진들과 100가지 이야기의 결과물인 “Another Life Is Possible:Insights from 100 Years of Life Together” (또 다른 삶은 가능하다: 함께 한 100년 삶에서 얻은 통찰들)에서 발췌한 것이다. -클레어 스토버

 

포츠 1908 ~ 1999

포츠는 필라델피아의 유명한 퀘이커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해버포드 대학에서 공부했고, 대학 축구팀의 후방 공격수로 활동했다. 졸업후 집안이 소유한 철강 도매 회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2 세계 대전 동안, 철강 산업은 전쟁 물자에 조력해야 하는 규제를 받게 되었다퀘이커 신앙의 전통적인 평화주의를 진지하게 받아들인 톰은 전쟁협력을 거부했다. 대신 미국 퀘이커봉사위원회에서 일했으며, 전쟁 기간 대체군복무로서  민간인 공공봉사 캠프를 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톰과 아내 플로리는 전쟁이 끝난 필라델피아에서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고 아이를 사립학교에 보내면서 다시 그들의 삶을 시작했다. 나중에 플로리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여러 위원회에서 활동했고, 좋은 대의와 인종 관계, 그리고 소작인들을 위해 일했어요. 그러나 특별한 결과는 없었어요." 퀘이커 친구들의 소개를 통해 파라과이의 병원을 위한 기금모금을 위해 미국을 방문중이던 브루더호프 회원들을 자신들의 집에 머물게 했던 부부는 결국 직접 파라과이를 방문했고 그곳에서 회원이 되기로 결정했다. 1952 퀘이커 모임에 보낸 톰의 공개 서한이 그들의 결정을 설명해 준다.  

포츠 가족 사진. 톰 포츠 가족 제공

“성인이 되고 나서 저는 줄곧 '평범한' 미국인의 삶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실천 불가능한' 예수님의 가르침 사이에서 좌절했습니다. 주중에는 바른 생활 사나이로 살았습니다. 철강 도매 회사의 공동 소유자라는 번듯한 직업도 있었습니다. 직원들과 동료애도 끈끈했고, 사업 확장을 위해 타회사와 경쟁하는 일에도 신바람이 났습니다. 광고도 가격도 모두 정직 했습니다. 종업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 애썼고 매년 크리스마스 파티도 열었습니다. 불우 이웃 돕기도 열심히 했고 이익 공유제도 실행했습니다. 하지만 이게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걸까요? 저는 신형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시내 전차를 타고 출근하는 직원을 걱정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불우 이웃 돕기에 내는 성금은 어차피 남는 돈 아닌가요? 나의 노후 대비를 위해 많은 비율을 떼어낸 다음에야 이익을 분배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만약 제가 가진 모든 것을 주어 버린다면, 제 가족과 저는 무엇을 먹고 살까요?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일까요?
하지만 예수님은 '너 자신을 돌본 후에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일요일이 되면 다른 퀘이커 교인들과 섞여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처럼 저도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실제 삶은 어떻습니까? 우리는 정기적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습니다. '당신은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아갑니까? 지나치게 이익을 추구하지 않습니까?' 저와 제 아내에겐 차가 두 대 있습니다. 저희 자녀들은 사립 학교에 다닙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뒤쳐지지 않으려고 사고 싶은 것은 다 삽니다. 저희 부부도 사실 원하는 건 모두 다 구매합니다. 이게 검소한 삶인가요? '지나친 이익 추구'는 또 어떻게 절제하나요? 제 생각엔 오늘날 회사 몸집을 부풀리지 않으면서 사업을 하기란 불가능합니다. 회사를 두 배, 세 배, 열 배로 키우기 위해 다음 20년을 소진하는 게 저한테 모슨 의미가 있을까요? 연봉이 갑절로 오르고 걱정은 산더미가 되겠죠. 어쩌면 좋은 일에 더 많은 돈을 기부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부금을 많이 낸다고 한들 하나님 나라를 이 땅 위에 세우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까요? 차라리 남은 생애를 참된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려 힘쓰는 게 낫지 않을까요?
미국은 군사력에 의해 급속히 장악되고 있고, 저는 퀘이커 평화 협회에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소득세를 국가에 납부합니다. 그런데 여기 다른 질문이 또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르침에 일치하지 않는 전쟁 준비에 반대하는 우리의 신념을 신실히 지키고 있습니까?”

각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재능,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고, 사랑에 기초한 진정한 하나됨의 삶을 함께 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믿을 수 없어서, 저는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제 아내와 세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1만6천 킬로미터를 달려갔습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미국은 군사력에 의해 급속히 장악되고 있고, 저는 퀘이커 평화 협회에 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소득세를 국가에 납부합니다. 그런데 여기 다른 질문이 또하나 있습니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정신과 가르침에 일치하지 않는 전쟁 준비에 반대하는 우리의 신념을 신실히 지키고 있습니까?”

우리 사회와 경제 체제는 각자가 자기 자신만 돌보면 모두가 행복한 최종 결과를 가져온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렇습니까? 후진 국가의 수백만 사람들은 것도 없이, 아직도 식량부족과 불량주택, 부실한 의복으로 살아가는 우리나라 인구의 3분의 1 어떻습니까? 질문이 묻습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들의 삶을 지속시키고 풍요롭게 있는 사회적, 경제적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모순은 어디에서나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저의 성찰의 시기에 완전히 좌절하지 않기 위해 저는 예수께서 인간이 수천 안에 성취해야 이상을 세우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 부부는 브루더호프를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산상수훈에 따라 살려고 노력한다고 했습니다. 미국을 방문중인 형제들이 파라과이와 우루과이, 영국의 공동체에서 850 이상의 사람들이 완전한나눔의 삶을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지와 재능, 재산을 하나님께 드리고, 사랑에 기초한 진정한 하나됨의 삶을 함께 추구하고 있다고 합니다.

믿을 없어서, 저는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기 위해 아내와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16 킬로미터를 달려갔습니다. 과연 그러했습니다. 그들의 사회와 경제 체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서로를 돌본다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이 행복해지는 최종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전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18 나라의 사회 각계각층에서 남녀들이 형제자매로 함께 살면서 서로 돕고, 열심히 일하면서, 깊은 영적 기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저의 일을 내려놓지 않고, 지금 당장 우주의 영적 법칙에 따라 조화롭게 있다는 소식을 퍼뜨리는 일에 동참하지 않을 있겠습니까?

기여는 적을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인종과 신념, 사회적 계급으로 인한 차별이 없는, 누구나 동등한 형제로 대우받는 실질적인 삶을 행동과 말로 진전시킬 것입니다.

단풍 나무로 만든 인체 공학적 의자는 커뮤니티 플레이띵스가 만드는 학교 가구이다. 의자에 뿌린 래커를 오븐에서 말리는 장면.

이렇게 톰과 플로리의 공동체 생활은 시작되었다. 1954년에 미국의 첫 번째 브루더호프 공동체인 우드크레스트가 설립되었을 때, 톰의 가족은 그곳으로 이사했고 톰은 공동체의 목공 사업을 관리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플로리는 비서로서 그를 마주보고 있는 책상에서 일하며 판매 부서를 조직하는 것을 도왔다. 당시  커뮤니티 플레이씽스(Community Playthings, 브루더호프의 사업명칭)의 제품군은 나무블록과 학교와 유치원을 대상으로 하는 교실 가구로 한정 구성되어 있었다. 제조 시설은 원시적이었고 공동체는 빚을 지고 있었다. 그후 40년 동안 톰이 이끄는  커뮤니티 플레이씽스는 나무 장난감, 놀이 기구 및 교실 가구를 판매하는 세계적 호평을 받는 회사가 되었다. 장애를 지닌 아이들이 일반 교실에 통합되기 시작한 1970년대 후반, 공동체의 한 작업장 근처에 있는 학교 교사들이 새로 올 학생들을 위하여 개조된 의자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했다. 이 기회는 톰의 인솔로 새로운 사업인  리프톤 보조기구(Rifton Equipment)로 발전했고, 이것은 현재 커뮤니티 플레이씽스와 같은 규모로 성장했다.

사업은 미국과 영국의 공동체를 지원하는 수입뿐만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의미 있는 노동을 제공했다. 톰은 공동체의 핵심 목적을 언제나 수익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매출이 늘고 제품 생산을 위한 초과 근무로 공동체 생활이 지장을 받게 되면 톰은 주문서를 조용히 책상 서랍에 넣어 두고 기다리곤 했다. 톰은 항상 사업 운영이 공동체의 가치, 고객과 판매자가 존중받고 제품의 디자인과 제조가 제품을 사용하게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반영하도록 신경을 썼다. (톰의 가지 사업원칙은 품질, 품질 품질이었다.) 톰은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자신의 사업적 결정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는데, 한번은 교회의 모임에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새로운 마케팅 방식에 돈을 것에 대해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기도 했다.

커뮤니티 플레이띵스 디자인팀이 3D 프린터로 만든 모형을 바탕으로 야외 놀이 기구를 만들고 있다.

톰은 자신을 절대로 중대한 인물로 여기지 않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공동체의 아이들에게 '늑대아저씨' 알려진 그는 어떤 아이가 사무실을 들여다보려고 문을 열면 일부러 으르렁 거리기 위해 하고 있던 업무 전화나 회의도 중단하곤 했다. (아이들은 환영받았고, 언제나 책상안에 숨겨둔 사탕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당신은 내가 부품을 조립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내 일은 언젠가 이 물건을 사용할 어린이에 대해 생각하는 겁니다.”

40 동안 성공적으로 사업을 경영한 , 톰은 지난 년간 그에게서 일을 배운 로즈 형제에게 직임을 넘겼다. ( 로즈의 읽기) 사업을 인솔하기에는 나이가 들었어도 여전히 활기찼던 톰은 리프톤 기구를 만드는 공장에서 보조 장비의 발판에 끈을 끼우는 일을 하러 다녔다. 공장을 방문한 손님이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본 적이 있었다. 톰은 “당신은 내가 부품을 조립 하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진짜 일은 언젠가 물건을 사용할 어린이에 대해 생각하는 겁니다."라고 했다.

톰과 플로리는 퀘이커 교인으로써 받았던 교육의 일면을 결코 잃지 않았다. 그들 집에서 가졌던 저녁 모임들은 퀘이커들이 한밤중 이라고 여기던 밤 10시면 끝이 났다. 퀘이커들은 '소박한 사람들'이고 톰의 가족은 단순함을 좋아했다. 일요일 점심으로는 공동체 부엌에서 쓰고 남은 야채로 '일요 수프'를 만들었는데 누구라도 톰 가족의 식탁에서 함께 즐길 수 있었다. 그들은 서로의 관계를 특징지어주는, 큰 사랑이 담긴 호칭(고어를 사용하는 퀘이커 교도들의 방식)으로 서로를 불렀다. 64살 된 톰의 아내 플로리가 걸어오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기 플로리가 오고 있네요. 너무 사랑스러워 보이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