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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red wooden fence between two buildings

    어떻게 이런 자를 용서하란 말인가?

    달갑지 않은 복음에 순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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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년 06월 12일 금요일

    다른 언어들: español,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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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새벽 어느 때쯤이면 사람이 어둠 속에서 빛을 구별할 수 있겠느냐?” 한 제자가 대답했다. “당나귀와 염소를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 스승은 아니라고 답했다. 다른 제자가 말했다. “무화과나무와 종려나무를 구별할 수 있을 때입니다.” 역시 스승은 아니라고 답했다. 그러자 제자들이 “그렇다면 도대체 언제쯤입니까?” 하고 물었다. 스승이 말했다. “너희가 모든 남녀의 얼굴에서 형제자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때가 바로 그때이다. 오직 그때만이, 너희는 빛을 본 것이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아직 어둠이다.” ―하시딤 이야기

    인간의 본성이 어떠하든,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을 형제나 자매로 볼 수 있는 능력은 은총이다. 가장 가까운 이들과의 사이에서도 약간의 불만만 생겨도 먹구름이 낄 때가 있다. 다른 이들과 진정한 평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때로는 기꺼이 굴복하는 것이 필요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먼저 솔직해져야 한다. 오늘은 고요함을 유지하기 위해 겸손이 필요할 수도 있고, 내일은 직면하거나 터놓고 말하기 위해 솔직함이 요구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여전히 남아 있다. 만일 우리가 관계 속에서 평화를 찾고자 한다면, 몇 번이라도 계속해서 기꺼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용서라는 것은 공평함이나 잘못된 일을 너그러이 봐주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사실 용서는 용서할 수 없는 어떤 짓을 한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너그러이 봐줄 때 우리는 그의 실수를 가볍게 넘긴다. 자신이 받은 상처를 계속 붙들고 있을 정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누군가를 용서할 때는 어떻게든 그 상처를 떠나보내야 한다. 보복을 하려고 애쓰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용서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화해를 위해 손을 내미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화와 분노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설령 상처입은 채로 남게 될지라도, 용서하는 태도를 통해 우리는 누군가를 뒤에서 험담하며 괴로워하는 일을 그만둘 수 있다. 또 바로 다음에 상처입었을 때 다시 한 번 용서를 하려는 결심을 강화시켜 줄 수 있다. 도로시 데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예수가 말씀하신 탕자 이야기에서 알 수 있듯이, 하느님은 쓸모없는 사람까지도 편을 드신다. …… 독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수도 있다. 탕자가 뉘우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지만, 그 다음 토요일 밤에 집을 나가서는 돈을 헛되이 써버렸을지도 모르고, 농사 일 돕는 것을 거부하고 대신 공부를 마칠 수 있도록 보내달라고 요구했을지 누가 알겠는가. 그 때문에 형이 화가 난 것은 정당한 일이다. …… 예수는 이런 주장을 펴는 이에게 또 하나의 답을 제시한다. 형제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일부러 위로하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언제나 해답은 있게 마련이다.”

    red wooden fence between two buildings

    Photograph by Joel Dinda.

    역설적이게도, 인생에서 가장 나쁜 일을 겪은 사람들이 종종 누구보다도 기꺼이 용서를 한다. 나는 사형제 반대 시위에서 빌 펠케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잔인한 살인자에게 할머니를 잃었다. 그럼에도 빌은 할머니를 죽인 십 대 청소년과 화해를 구하였고, 마침내 종착점을 발견했다.

    빌의 할머니는 이웃 아이들에게 성서를 가르칠 정도로 사교적인 분이었다. 1985년 5월의 어느 날 오후, 그녀는 소녀 네 명에게 문을 열어주었다. 몇 구역 떨어진 고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었다. 그런데 소녀들은 눈 깜짝할 사이에 강도로 돌변하더니 빌의 할머니를 때려서 바닥에 쓰러뜨렸다. 그러고는 물건들을 훔쳐서 낡은 차를 타고 도망쳤다. 바닥에 쓰러진 빌의 할머니는 칼에 찔린 상처들 때문에 출혈이 심했고, 결국 죽게 되었다. 빌은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소녀들은 훔친 차로 친구들을 태워주며 기분을 내다가 붙잡혔다. 그리고 재판에 회부되었고, 15개월 후에 선고가 내려졌다. 한 소녀는 34년, 다른 두 소녀는 6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라 쿠퍼라는 소녀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나는 최소한 한 명이라도 사형을 받은 것에 만족했다. 만약 그들이 사형 선고를 받지 않았다면, 법정이 내 할머니는 중요한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나는 할머니야말로 정말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폴라가 사형 선고를 받은 지 4개월 후에 나는 사귀던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관계를 되돌리려고 함께 노력했지만 결과는 더 참담해져갔다. 나는 어디에서도 평화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고공 크레인을 운전하다가(나는 베들레헴 철강에서 일하고 있었다), 왜 일들이 잘 풀리지 않는지에 대해, 그리고 할머니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곧바로 ‘왜죠, 하느님? 도대체 왜요?’ 하고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이 나라에서 가장 어린 여자 사형수가 된 폴라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 아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가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라고 말하는 것을 마음에 그려보았다. 나는 폴라가 사형 선고를 받던 날을 기억했다. 그 애의 할아버지가 법정에서 ‘저것들이 내 손녀딸을 죽이려고 한다’고 울부짖던 모습이 떠올랐다. 폴라의 할아버지는 법정 밖으로 끌려나왔고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와 그분의 믿음, 그리고 성서에서 분명하게 언급하는 용서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 구절이 생각났다. 하나는 하느님이 그대를 용서하기 위해서는, 그대가 먼저 다른 이들을 용서해야 한다는 구절이 었다. 또 한 구절은 예수가 베드로에게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처형되면서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말씀하신 구절이다. 폴라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한 소녀가 어떤 여인을 서른세 번이나 찔렀다면, 그 아이는 제정신이 아니다.

    갑자기 나는 그 아이를 용서해야 한다고 느꼈다. 나는 바로 그 순간, 그 장소에서 하느님께 나에게 그 아이를 향한 사랑과 동정심을 주시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가 내 인생을 바꿔버렸다. 나는 더 이상 폴라가 전기 의자에서 죽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사형 집행이 나를 위해서나 다른 그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해결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크레인에 들어갈 때는 좌절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45분이 지난 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왔다.”

    빌은 재판 후 몇 번이나 폴라를 방문했고, 설교가 아닌 자비를 보여줌으로써 할머니의 믿음을 그녀에게 전해주려고 애썼다. 빌은 더 이상 가족들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나눈 거실에 사랑하는 할머니가 피투성이가 되어 누워 있는 모습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는 여전히 할머니의 죽음 때문에 고통스럽다. 그러나 그 고통은, 그가 겪어야 했던 쓰라린 고뇌를 다른 이들은 덜 겪게 해야겠다는 결심으로 연결되었다. “내가 그 소녀들을 증오하는 한은 계속해서 그들이 내 인생을 조종했다. 그들을 용서하기로 선택하자마자 나는 자유로워졌다.”

    이제 빌은 회복적 정의 운동의 헌신적인 활동가로, ‘희망의 여행: 폭력에서 치유로(Journey of Hope: from Violence to Healing)’라는 조직과 함께 전국을 누비고 있다. 그는 또 ‘화해를 위한 살인 피해자 유족회(MVFR)’라는 모임의 회원이기도 하다. “용서야말로 폭력에서 치유로 향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용서함으로써 증오의 부식 작용을 덜 수 있고, 다시 당신 안의 평화에 머물 수 있는 자유를 누리게 되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인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다. 또 우리가 괴로워하는 많은 일들이 꺼내놓고 보면 심지어 우스꽝스러운 일일 때도 있다. 그런데도 용서를 하기가 힘든 때가 있다. 특히 오랜 시간 동안 분노가 커온 경우에는 분노를 근절시키는 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상처가 실제적이든 상상에 의한 것이든, 우리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있는 동안에는 그 상처가 우리를 파먹어 들어갈 것이다.

    상처를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반대로, 상처를 잊어버리기 위해 자신의 불만을 무의식 속으로 밀어 넣는 사람은 자신을 불구로 만들 뿐이다. 상처를 용서하기 전에 그것에 이름을 붙일 수 있어야 한다. 때로는 용서하고자 애쓰는 사람과 직면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거나, 가능하더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때 최선의 해결책은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과 고통을 나누는 것이다. 일단 고통을 나누고 나면 그 상처를 떠나보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사과를 기다리면서 영원히 분개한 채로 남아 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면 우리는 하느님과 분리된 채로 지내게 된다.

    누군가에 대해 원한을 품고 있는 한, 하느님께로 향하는 문은 닫히게 된다. 그분에게로 가는 그 어떤 길도 없이 완전히 닫히게 된다. 우리가 기도를 드려도 많은 기도가 하느님께 들리지 않는 까닭은, 비록 기도하는 사람이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누군가에게 원한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 마음속에 하느님의 평화를 원한다면 제일 먼저 용서를 배워야 한다. (하인리히 아놀드, 공동체 제자도)

    지은이 JohannChristophArnold 요한 크리스토프 아놀드

    저자는 결혼, 부모역할, 교육, 노년 등을 주제로 활발한 저작, 강연 활동을 했으며, 기독교 공동체 브루더호프에서 목사로 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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