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rning over the bay

참된 우정

데틀레프 슈비처(Detlef Schwietzer)를 기억하며

저자 요르그 바트 글, 박소혜 번역

0 의견
0 의견
0 의견
    등록

* 데틀레프(Detlef)는 사회주의 동독에서 힘든 성장기를 보냈다. 어머니의 버림을 받고 고아원에서 자란 그는 군에 들어가거나 정부에 협력하는 것을 거부해 수년의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했다. 다음은 데틀레프가 2005년에 친구들에게 들려준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다.

나는 1948년 10월 30일에 서베를린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은 서로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고 나는 2살에 동베를린의 가톨릭 고아원에 가게 되었기 때문에 부모님에 대한 기억은 전혀 없다. 알파벳을 배울 때부터 우리는 사회주의를 주입 받아 규율을 따르게 되어 있었다. 이 고아원에서는 10년을 지냈는데, 이곳에서 모든 아이들은 평등한 대우를 받았다. 가톨릭교도든 개신교도든 상관이 없었고,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이 때가 내겐 가장 좋은 시절이었다.

12살이 되어 국가가 운영하는 고아원에 가게 되면서 내 유년 시대는 끝이 나고 말았다. 이곳의 직원들은 대부분이 우리 아이들에 대한 열정과 동정심이 없었다. 교육을 담당한 사람들은 우리가 숙제를 하는지 마는지 관심이 없었지만 누군가가 국가에 대해 나쁜 말이라도 했다 하면, 그 사람은 곧바로 사무실로 끌려갔다. 그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 수 없었다.

14살이라는 나이에 이 국가 고아원의 아이들은 군사 훈련을 받고 공기소총을 쏘는 법을 배웠다. 나는 이것을 하지 않겠다고 거부했기 때문에 직원은 나를 나무에 묶어두고 다른 남자아이들이 나를 향해 총을 쏘게 했다. 내 흉곽에 작은 탄환 자국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이때의 경험 때문이다. 가톨릭 고아원과 국가 고아원 간의 이 확연한 차이로 인해 나는 폭력이라면 어떤 종류든 잘못된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학교를 마치면서 나는 양치기 견습 과정을 시작했다. 3년 후에 이 과정을 마쳤지만 양 알레르기가 발병하였고, 다른 동물에 대해서도 그런 반응이 나타날 가능성이 있어 나는 동물과 함께 일하는 일을 완전히 그만두어야 했다. 이후 조합 농장에서 일자리를 얻었으나 첫 번째 월급을 받고서 조합 회원 차감액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차감된 돈은 군을 위해 쓰이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불평을 하자(나는 조합 회원이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를 위해 일하는 사람은 누구나 조합 회원이다”라고 답했다. 그러나 나는 공정한 월급을 달라고 요청하면서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보겠다고 말했으나 그 후 나는 위험에 처했다. 일주일 동안 나는 작업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곧 체포되어 사회주의 국가에 내 노동력을 바치지 않는 것을 이유로 기소를 당했다. 집행유예 없는 2년 형을 선고 받았다. 이것이 법과 갈등을 겪은 첫번째 경험이었다.

19살이라는 나이에 출소하자마자 군으로부터 강제징집 통보가 도착했다. 나는 군 본부에 편지를 써서 통보에 따를 수 없다고 말하며 그 이유를 썼다. 즉 결코 무기를 손에 잡거나 군수품 공장에서 일하지 않을 것이며 모든 폭력에 반대한다고 설명했다. 그 편지에 대한 명령이 내려질 때쯤엔 이미 그 결과가 어떤 것일지 알고 있었기에 나는 숨어 있었다. 결국 나는 경찰에 잡혔다. 나는 주지방 변호사도 쓰지 않겠다고 거부했다. 그들의 변호 내용이 신통치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신념을 강하게 갖고 있다면 그것을 나 스스로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변론을 통해 나는 그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군 징집 거부에 부과되는 일반적 형기는 2년이지만 나는 전과가 있다는 이유로 3년 형을 받았다. 내 이름에는 “국가의 적 1번(Enemy of the State No. I)”이라는 딱지까지 붙었다. 이 징역살이 이후 나는 사회주의 국가에 협력하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4차례 더 구속되었고, 감옥에서 산 시간을 모두 합치면 13년이 된다.

감옥에서의 데틀레프의 경험은 극도로 힘들었다. 재소자들은 일을 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그는 이것을 거부했고, 그 때문에 그가 감옥에서 보낸 시간 중 대부분은 독방에서 지내야 했다. 그는 한쪽 끝에 화장실이 있고 벽돌로 만든 침대가 있는 작은 감방에 투옥되었다. 침대 윗부분은 일부러 거칠게 만든 석고반죽이 입혀 있었다. 단 한 장의 담요만이 Detlef as a young man주 어졌기에 그는 그 위에 누울지, 그것을 덮을지를 정해야 했다. 2년 가까이 가로, 세로 길이 60센티미터, 높이는 정확히 2미터인, 서서 지내야 하는 감옥(standing cell)에 매일 갇히기도 했다. 다행히 그가 몸이 큰 사람이 아니었기에 팔을 조금씩 위아래로 움직일 수는 있었지만 그래도 쭉 뻗을 수는 없었다. 단 하나의 25와트짜리 전구만이 감방 안을 온종일 비추었고 음식은 작은 구멍을 통해 들어왔다. 그는 하루에 16시간씩 이 감방에 있다가 잠을 자러 일반 감방으로 갔다. 그는 정기적으로 심문을 받았으나, 심문이 진행되기는커녕 그냥 서서 지내는 감방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답을 할 수밖에 없어 무척 상심했다. 한 번은 며칠이고 눅눅한 지하 같은 감방에서 해충들이 자기 위를 기어 다닌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3주 동안 계속해서 아침 저녁으로 빵 반 조각과 커피 반 컵만을 마신 적도 있다고 한다. 나중에 그는 인간이 얼마나 시간에 잘 적응해가는지를 깨닫고 놀랐다고 회상했다. 순전함이 그에게 힘을 주었고 투지가 그를 끌어당겼다. 상황이 그토록 가혹했던 것은 재소자들이 용기를 잃고 자살하게 만들려는 계획 때문이었다. 많은 동료 재소자들이 자살했지만 이에 대해 데틀레프는 자신이 감옥에 이로운 짓을 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데틀레프는 바우첸(Bautzen)이라는 악명 높은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 감옥은 나치가 사용해온 것으로, 많은 감옥 직원들과 간수들도 나치 시기부터 그곳에 고용되어 있던 사람들이었다. 재소자들에 대한 처우는 보통 매우 난폭했다. 데틀레프가 그곳에 있는 동안에도 재소자들이 총에 맞아 죽는 일이 발생했다. 감방 벽에는 재소자들의 팔과 다리를 쭉 뻗게 해 쇠고랑을 채우는 고리가 달려 있었다. 재소자들은 채찍질을 당했다. 바우첸에서는 1년 동안 3,0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질병과 학대, 자살로 목숨을 잃었다.

두 번째로 수감되었을 때 나는 구리 광산에 보내졌다. 나는 지하 1,200미터 아래의 터널에서 일했다. 일은 힘들었지만 즐거웠다. 하루는 거기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엄청난 천둥 소리와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가까운 터널이 붕괴된 것이었다. 미세 먼지와 돌들이 빗발치듯 쏟아졌다. 우리는 그 즉시 작업장을 떠나야 했다. 기어서 공사장 비계를 지날 때 보인 큰 흙더미가 나는 못내 신경이 쓰였다. 맨손으로 그 더미를 헤치기 시작하자 그 안에 묻혀 있던 한 사람이 보였다. 나는 그 사람을 빼내려고 흙을 더 팠고 탄광 감독을 불러 함께 그를 꺼냈다. 땅 위로 올라오자마자 우리는 그 즉시 의료 직원들의 진료를 받았다. 감독은 손을 흔들며 내 재빠른 대응에 감사를 표했다. 그는 나에 대해 잘 말해주어 빨리 석방될 수 있게 해주겠다고 말했다. 그 다음날 나는 생명을 구한 일에 대해 노동자들이 모인 앞에서 상을 받았고 20마르크가 든 봉투도 받았다. 이에 나는 놀라고 또 화가 나서 그 봉투에 이렇게 써서 돌려주었다. “사람의 목숨이 당신에게 이 정도의 값어치밖에 안 된다면, 저는 이것을 받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나는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그들은 반란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나를 기소했다. 나는 동독 비밀 경찰에 짧지만 분명한 내용의 편지를 써 보냈다. 3주 정도 후에 경찰이 나를 데려가 탄광 감독과 두 명의 주정부 경비를 만나게 했다. 그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모든 노동자들 앞에서 일어난 일이었기 때문에 감독은 나의 주장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나는 더 빨리 풀려났고 추가로 500마르크를 받았다. 반란 혐의에 대해 유죄 선고를 받았다면 적어도 5년 동안은 풀려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사회주의 정부에 협력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바꿀 수 없었고 바꾸려 하지도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계속해서 감옥에 들어가야 했다. 형기 사이의 중간 시간은 길거리에서 보냈다. 주로 당국으로부터 숨기 위함이었다. 나는 끊임없이 도망 다니면서 다락이나 지하, 혹은 어디든 마른 구석이 있으면 찾아가서 잠을 청했다. 생활은 고철을 모아 파는 것으로 해결했다. 불행히도 나는 13살의 나이부터 이미 술을 마시기 시작했었다. 감옥에 있게 된 후부터는 더 심하게 술을 마시게 되어 알코올 없이는 살 수 없��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결혼을 했지만 알코올과 당국과의 갈등으로 인한 문제 때문에 나는 아내와 멀어졌다. 결혼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결혼을 하면 법률 상 내가 기혼 남성으로서 보다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5년 간 같이 살다가 이혼했다. 이혼 이후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길거리에서의 생활은 더 어렵고 위험해졌다. 다행히 내게는 그리 심각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저녁에는 무료 급식소에 앉아 있다가 보니 길 건너편의 교회에서 십자가 불빛이 보이고 사람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궁금해져서 그 안에 들어갔더니 교회 사람들이 저녁 식사에 나를 초대해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기독교 공동체로 사는 무리인 'Basisgemeinde'를 만났다. 그날 저녁 이후 나는 더 자주 교회에 갔다. 그곳에서 받은 사랑과 관심을 통해 나는 결국 술을 끊을 수 있었다.

2003년에는 영국의 다벨 공동체로 옮겨왔다. 그곳에서 도착했을 때 모든 형제 자매들이 나를 환영해주었다. 나를 위해 옳은 일을 마련해주시고 나와 함께 하시고 뒤돌아보는 일 없이 나를 계속해서 인도해주실 것이기에 하나님께 감사 드린다.

Detlef on his tricycle

데틀레프는 생애 마지막 6년을 함께 보낸 형제 자매들을 사랑했다. 그는 아이들을 위한 연례 어린이축제(kinderfest)를 시작하였으며, 젊은이들을 위해 게임이 어우러진 피자 파티를 열고 매년 크리스마스에는 공동체의 노인들을 한 자리에 모았다. 그는 술과 담배로 이어지는 노래 부르기와 즐기는 시간을 사랑했다. 그러면서도 사람들이 자기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은 원치 않았다. 누군가가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했다면 그는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Menschenlob ist Scheisse. Ihr sollt Gott danken(사람에 영광을 돌리는 것은 엿 같애. 하나님께나 감사해.)”

(데틀레프는 2009년 11월 16일 독일 방문 중에 예기치 않은 죽음을 맞았다. 다음은 그의 절친한 친구인 Jörg가 데틀레프의 장례식 때 한 말이다.)

한 사람의 영혼의 내면을 일별한다는 것은 놀랍고도 대단한 일이다. 나는 데틀레프를 통해 이런 것을 경험한 듯하다. 그는 내 친구였다. 내 평생의 친구들 중 최고의 친구일 것이다. 많은 점에서 그는 우리 가족의 아버지요, 할아버지 같았다. 데틀레프는 힘든 인생을 살았다. 과거에 경험한 많은 배신들로 인해 그는 사람을 쉽게 믿지 못했다. 그에게는 조심스럽게 친구를 택하는 외톨이 기질이 있었다. 그는 자주 거칠어졌고 말을 험하게 했 으며 참을성이 없었다.

Detlef and friends singing

우리 가족으로 지낸 6년 동안 그는 늘 우리의 좋은 친구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3년 전 우리가 여행을 하고 있던 중에 나를 향해 뒤돌아 서더니 그가 말했다. “이제 우리가 진짜 친구가 될 때가 온 것 같아.” 그러고는 나를 꼭 안아주었다. 죽기 며칠 전 그는 그 때 일을 내게 상기시켰다. 그것은 우리 둘 사이에 있던 신뢰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으며 많은 것들에 대해 토론했다. 우리 사이가 늘 좋았다는 말이 아니다. 때로는 서로 의견이 맞지 않을 때가 있었고, 나는 전보다 더 많은 지혜를 짜내어야 그를 도울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서로에게 사과의 말을 해야 했지만(마지막 몇 달 간은 더 자주 사과했다) 이 모든 것으로 인해 우리는 더욱 가까워졌다.

데틀레프의 인생은 그야말로 놀라운 고통과 용서의 이야기로 채워져 있다. 물론 그 자신은 그렇게 표현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는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들에 대한 적대감이 전혀 없었다. 그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는 '현재'를 살았다. 중년이 되어서야 신앙을 갖게 되긴 했지만 대가가 얼마든 그는 자신의 양심을 따랐다. 그의 생애를 나타내는 특징적인 표시가 있다면 그것은 타인에 대한 그의 사랑과 관심 속에 들어있던 ‘용서의 자세’일 것이다. 이것이 그가 우리에게 남겨준 유산이다. 데틀레프에게 있어서 이 마지막 6년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은 시간이었다. 그는 다벨을 사랑했다. 독일도 자주 방문했지만 돌아올 때는 언제나 기쁜 마음이었다. 그는 이전에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집과 사랑을 찾았다. 전과자이자 영어는 한 마디도 할 줄 모르는 길거리의 한 사내가 사우스이스트 잉글랜드에 소재한 한 공동체를 ‘나의 집’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이것이 그의 인생의 기적이자 신비다.

Portrait of Detlef
의견이 있으세요? 토론에 참여해 주십시오. 0 의견
0 의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