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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ilhouetted trees above a valley

    에버하르트 아놀드는 누구인가

    - 플라우 편집부

    2014년 09월 24일 수요일

    다른 언어들: العربية, Engl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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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ang Kook Ro

      오래 전부터 블룸하르트 부자(父子) 목사의 활동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메일을 통해 기도문과 에버하르트 아놀드 목사에 대한 정보를 접해서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관심을 갖고 탐구해 보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글은 『소금과 빛』의 일부입니다.

    오늘날에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지만 에버하르트 아놀드(1883—1935)는 그의 생애 동안 모국인 독일에서 대중연사로, 강사로, 그리고 출판가로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브레슬라우와 할레, 그리고 1909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에어랑엔에서 공부하는 동안과 공 부를 마친 그 이후에도 그는 당시 그 지역을 휩쓸던 학생부흥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나중에는 독일기독학생연합의 총무로 일했다. 1916년에 그는 베를린에 있는 푸르헤(Furche) 출판사의 문학부서와 월간지 편집 책임자로 일했다.

    1920년대의 수많은 독일 청년들처럼 에버하르트 아놀드와 그의 아내 에미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사회 문제에 답을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 기관들 - 특별히 교회 - 에 환멸을 느꼈다. 그리고 스스로 사회 문제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에서 그들은 독일청년운동(German Youth Movement, 당시 아놀드는 전국적으로 알려질 만큼 이 운동에 가담하고 있었다)과 독일 목사인 요한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와 그 아들 크리스토프 프리드리히 블룸하르트, 16세기 아나뱁티스트들, 그리고 가장 두드러지게 초대 기독교인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에버하르트는 진지하게 해답을 찾던 그 시절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12 내가 지금까지 걸어온 탐구의 여정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한 무리의 젊은 사람들이 내 주위에 자주 모였고, 나는 성경공부와 대화를 통해 그들을 예수님에게 인도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이것으로 는 더 이상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우 난감한 상황에 놓여, 나는 어찌 할 바를 모른 채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더 깊은 관점에서 사람들의 필요를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육체와 영혼의 필요, 물질적, 사회적 필요, 그리고 그들이 당하는 굴욕과 착취 와 노예상태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맘몬과 불화(不和)와 증오와 폭력의 엄청난 세력을 피부로 느끼게 되었고, 힘없는 자의 목을 짓누르는 압제자의 잔인한 구둣발을 목격했습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은 내 말을 다소 과장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그 무렵, 그러니까 1913년부터 1917년 사이에 나는 진리를 깊이 이해하기 위해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습니다. 그런 가운데 나는 인간의 영혼을 위한 개인적인 헌신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전부가 아니라는 것, 그것만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온전히 표현하지 못한다는 것을 더욱 더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사람들에게 순전히 개인적인 기독교 신앙으로 다가간다거나, 또는 그들도 나처럼 사적(私的) 신앙을 갖도록 개인들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4년의 기간 나는 힘겨운 싸움을 경험했습니다. 나는 옛 문헌들과 예수님의 산상수훈과 성경의 다른 부분들을 자세히 연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현재의 사회 체제에서 압제 당하는 사람들인 노동자 계층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과 삶을 함께 나누고 싶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길과 아씨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길과 선지자들의 길에 상응하는 어떤 길을 발견하고 싶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 나는 친구에게 계속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글을 써 보냈습니다. 예전의 나는 개인에게 관심을 가지고 복음을 선포했고, 이런 식으로 예수님을 따르려고 무척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 는 실제적으로 인류 전체를 섬기는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성취하려 했던 그 대의를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어떤 구체적인 실체를 확립하는 일에 나 자신을 헌신하고 싶었습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한 일들이 우리 눈앞에 일어났습니다. 우리는 전쟁에서 돌아온 사람들의 비참한 상태를 보았습니다. 한 젊은 장교는 두 다리가 모두 절단된 채 돌아왔습니다. 그는 애정 어린 간호가 매우 절실한 상태였고, 그걸 기대 하며 약혼자에게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이 건강한 남자와 이미 약혼한 사실을 그에게 말해 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베를린에는 굶주림이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은 아침 점심 저녁으로 순무 뿌리로 연명해야 했습니다. 돈이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서 관공서를 찾아가도 “배고프면 순무를 먹으시오” 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 당시 아무도 가지지 못하는 젖소를 소유하고 우유를 짜서 먹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족들이 심지어 베를린 한 복판에 살고 있었습니다. 죽은 아이들의 시체를 실은 수레들이 거리를 지나갔습니다. 시체들은 신문지에 둘 둘 싸여 있었습니다. 관을 살 돈도 없었고, 아이들의 시체를 관에 넣을 시간도 없었습니다. 1917년, 나는 거리에서 말이 쓰러져 죽는 것 을 보았습니다. 굶주린 사람들은 마부를 길바닥에 쓰러뜨리고는 아직 따뜻한 고깃덩어리를 베어내어 가족에게 가져가기 위해 말에게 달려들었습니다.

    그 즈음 또, 나는 지하실에 사는 한 불쌍한 여인을 방문했습니다. 방 벽을 타고 물이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그 여자는 결핵을 앓고 있었지만 친척들과 방을 같이 쓰고 있었습니다. 길을 가는 사람들이 일으킨 먼지 때문에 좀처럼 창문을 열 수도 없었습니다. 내가 살 만한 다른 장소를 찾아주겠다고 제안하자 이렇게 대꾸했습니다. “더 이상 바보짓 하기 싫어요. 그냥 지금까지 살아온 이곳에서 죽게 놔 두세요” 그 여자는 살아있는 시체였습니다.

    이러한 경험들과 혁명기의 일들을 겪은 후에, 나는 진행되는 모든 상황들을 더 이상 참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기독 학생운동의 한 지도자는 내가 전쟁과 사회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기만 한다면 나의 일을 도와주겠다는 어떤 고위 관리의 말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친구들과 베를린의 우리 집에 모여 이 모든 문제들을 놓고 토론하는 가운데 곧 한 가지가 명백해졌습니다. 예수님의 길은 실제적 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혼에 대한 관심 이상의 것인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길은 간단히 이렇게 말합니다. “만약에 당신에게 옷이 두 벌 있으면 옷 한 벌은 없는 자에게 주십시오.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에게 꾸고자 하는 이웃을 거절하지 마십시오. 한 시간 일해 줄 것을 부탁 받으면 두 시간 일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정의를 실현하도록 애쓰십시오. 만약에 당신이 가족을 가지고 싶으면 가족을 가지고 싶어하는 다른 모든 사람들도 역시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살펴보십시오. 만약에 당신이 교육과 일과 만족스러운 활동을 바란다면 이것들이 다른 사람에게도 똑같이 가능하도록 만드십시오. 만약에 당신의 건강을 돌보는 일이 당신의 의무라고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의 건강을 돌보는 동일한 의무가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십시오.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당신도 남을 대접하십시오.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입니다(마 7:12). 좁은 문으로 들어가십시오. 이 길이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되는 길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명백해지면서 우리는 우 리가 이 길을 갈 수 있으려면 걸인처럼 가난 해져야 하며,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인류의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요구를 스스로 떠맡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고난을 견디어내며, 불의가 세상을 얼마나 지배하고 있는지를 보면서 고통스러워하게 됩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보다 정의에 더 굶주릴 때에만 우리는 두 마음을 품지 않게 될 것 입니다. 그 때 우리는 이 정의 때문에 핍박을 받게 되고, 그런 다음에야 우리의 의가 도덕주의자들과 신학자들의 의보다 더 낫게 될 것 입니다.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력에서 나오는 새로운 불과 새로운 영과 따뜻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이러한 관련 속에서 예루살렘의 초대 기독 교 공동체가 단지 하나의 역사적 사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또한 분명해졌습니다. 산상수훈이 실제로 이 땅에 실현되었던 곳이 바로 이 초대교회였던 것입니다. 특권이나 권리는 조금도 남김없이 포기하고, 완전한 사랑의 길에 온전히 투신하는 일이 그 어느 때 보다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습니다. 이 사랑은 성령의 호흡에 의해서 이 땅에 부어질 사랑이며 초대 교회 공동체에서 일어난 사랑입니다.

    이렇게 되자 우리는 이제껏 살아온 형태의 삶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영혼 뿐만 아니라 육체에도 역시 관심을 가지셨다 는 사실을 증거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못하는 사람을 보게 하셨으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셨으며 듣지 못하는 사람을 듣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세상의 상황  질서를 완전히 바꾸게 될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 나라를 예언하셨습니다. 이것을 시인하고 이것에 따라 사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산상수훈의 요구를 실천하려는 불타는 열망으로 다섯 명의 아이들과 몇몇 다른 사람들과 함께 아놀드 부부 는 1920년에 자네츠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농사를 지으면서 작지만 생동감 넘치는 출판사를 운영 하던 공동체는 수천 명에 달하는 많은 방문객의 관심을 끌었으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1926년이 되자 자네츠의 집이 매우 비좁게 되었고, 그래서 그 다음 해에 브루더호프 (형제들의 처소)는 뢴 언덕 근처에 새로운 자리를 마련했다. 브루더호프는 1930년대 나치정권에게 박해를 받아  일에서 추방되었다. 이웃 나라인 리히텐슈타인에 잠시 무른 후에 브루더호프 식구들은 영국으로 피해 그곳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다. 여기서 출판사가 처음으로 착수한 주요 작업은 이 책에 포함된 기사와 좌담을 포함해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가장 중요한 여러 저작물을 번역하는 일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은 1940년 브루더호프를 파라과이로 내몰았다. 그리고 1954년에 첫 번째 미국 브루더호프가 세워졌다. 이제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다음 글과 함께 이 책을 여러분에게 권한다.

    우리는 새로운 탄생을 믿습니다. 이 생명은 하 나님으로부터 오는 빛의 생명입니다. 우리는 사랑이 지배하는 장래 나라와 건설적인 친교를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믿고, 하나님께서 이 땅에 임하시리라는 것을 믿습니다. 이 믿음은 우리가 다만 미래에 일어날 일을 상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께서 오늘 이 미래를 실현시키실 것이며 그분의 마음과 영을 지금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는 믿음입니다. 그리스도는, 다가올 나라의 살아있고 감추어진 씨앗인 자신의 교회 안에 거하십니다. 평화와 미래 나라의 사랑의 영이 교회에게 맡겨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지금 이 세상에서 정의와 평화와 기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 글은 『소금과 빛』 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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